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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조선시대에 수레가 없었다는 사실은 날조된 거짓말이다?

 


실학자인 박제가는 그의 저서인 '북학의'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는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레는 소가 끄는 달구지가 아니라,


튼튼한 말이 끄는 수레인 마차를 말합니다.


청나라에서 사용되던 수레 역시, 말이 끄는 수레였지요.






사실, 박제가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른 면이 있습니다.


함흥과 같은 북쪽 지역에서는 이미 수레가 물류 이동의 도구로써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왜 함흥에서만 말이 끄는 수레가 있었느냐고 반문하신다면


당시, 함흥을 위시한 함경도에는 튼튼한 군마들이 많았습니다.


함경도 북병영에는 친기위라고 불리는 정예 기마부대가 있었고


이런 튼튼한 군마들은 청나라에서 직접 수입해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교통수단으로 많이 쓰이던 


제주의 조랑말과는 달랐습니다.


힘과 체격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수레 사용에 이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조선 전기인 세종 임금 시절만해도 말이 끌던 마차 수레가 있었습니다. 




[사진] 조선시대에도 택시 미터기가 있었다? 지난 14일 개관한 국립과천과학관에 전시된 기리고차(記里鼓車)가 바로 그것이다. 기리고차는 거리를 재는 수레로 현재의 택시 미터기처럼 얼마나 달렸는지를 알려준다. 톱니바퀴의 움직임을 이용한 원리도 비슷하다. 





기리고차라는 수레는 조선 세종시절, 톱니바퀴를 이용해 거리를


측정하던 수레로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기술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이용한 수레 제도는 어찌된 일인지 폐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습니다.





"우리 나라 땅이 중국과 같이 평탄하면 수레를 쓰는 것이 어렵지 아니하나, 세종조(世宗朝)에도 각역으로 하여금 수레를 쓰게 하였는데, 길이 험하여 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드디어 폐하였습니다.


 이제 비록 법을 세울지라도 또한 쓰지 못할 것입니다. 민간의 평탄한 곳에는 지금도 쓰고 있으나, 참부(站夫)들이 수송하는 데 쓴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문종실록 6권, 문종 1년 2월 13일 임오 3번째기사




그렇다가, 조선 후기인 정조 임금때 와서 


다시 수레 사용에 대한 상소문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정조 7년, 홍양호가 중국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북경에서 사용되는 수레를 직접 타보고 편리성을 자각하자,


조선에서도 즉시 말이 끄는 수레를 사용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정조 17년에도 장령 정의조가 수레 사용를 주장했습니다. 





장령 정의조(鄭毅祚)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좁아서 수레로 짐을 운반하는 것이 편리하지 못하고 오직 북도의 함흥 등 여러 곳에서만 백성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원부(水原府)는 지형이 평평하여 함흥과 다를 바가 없으니 지금 함흥과 똑같이 수레로 운반하는 제도를 창안하여 강과 바다에서 나는 산물과 남쪽과 북쪽에서 생산되는 화물을 손쉽게 수송하여 유통하게 하면 틀림없이 고을의 수용(需用)과 주민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수레 제도를 강구하고 백성들을 지휘해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렇게 상소문이 빗발치니,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말이 끄는 수레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진] 김홍도 그림에 등장하는 말이 끌던 수레인 조선의 마차. 정조 임금시절부터 보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에 보듯이, 조선 정조 임금 시절의 화가였던 


김홍도 그림에서는 말이 끌던 수레가 등장합니다.


청나라에서 흔히 쓰이던 태평거와 비슷한 형식으로 보입니다.








[사진] 청나라에서 쓰이던 사람이 타던 교통수단인 '태평거'. 말이 끌던 수레였다. 





이런 조선식 마차는 서울 사대부들 사이에서 사치품으로 인식되었듯 합니다.


그래서 삼사의 신하들이 이를 못마땅히 여긴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홍문관 교리 고시신이 상소하다. 


신이 서울에 와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로 말한다면 오늘날처럼 사치스러움은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서울 경대부(卿大夫)된 자가 화려한 수레를 타고 따뜻한 비단옷을 입으며 특별히 좋은 집에 거처하면서 지극히 기이하고 교묘한 놀이를 즐기지 않는다면, 모두가 면목 내세움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가마 메는 하인까지도 너나없이 경대부와 견주고자 하며, 심지어는 초서피(貂鼠皮)와 주패(珠貝)로 꾸미고, 수레나 말이나 주택도 사치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 국가의 용도와 백성의 재물이 어찌 탕갈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위에서 솔선 수범하신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쉬울 것입니다. 


(중략)


제도에 지나친 수레·말·주택과 연경(燕京,북경)에서 사들인 비단을 각별히 엄금하소서. 그러면 필시 하령하지 않아도 자연히 교화될 것입니다.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 4월 17일 임술 3번째기사





헌종 임금때가 되면, 


수레가 고급관료들의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해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실록에서 확인됩니다.


그래서, 몇몇 신하들이 무관들에게는 말이 끄는 수레를


타지 못하도록 상소까지 올리는 지경에까지 이르지요. 






박종훈이 곤수 이하 수령·변장에게 수레를 타지 못하도록 아뢰다



"무신(武臣)이 수레를 타는 것은 반드시 금지한 바가 있는데, 곤수의 변진(邊鎭)에서 마패(馬牌)를 가진 자로 역마(驛馬)를 타도록 허락받은 자가 치우치게 이 풍습(風習)을 숭상하여 수레가 아니면 타지를 않으므로, 수레에 익숙하지 않은 말에게 지극히 크고 무거운 수레를 끌게 하니, 겨우 한 번의 행차만 치르면 반드시 쓰러져 죽고야 맙니다. 



대저 험한 길에서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이 육지에서 배를 운행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서북(西北)의 역로(驛路)가 날로 조잔(凋殘)해지고 피폐해가는 것이 오로지 이에 말미암는데, 이번의 행차에서 본 역참(驛站) 마졸(馬卒)의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이 연전에 견주어 갑절이나 심했습니다. 



이제부터 곤수 이하 수령(守令)·변장(邊將)으로서 만약 수레를 타는 자가 있으면, 우관(郵官)으로 하여금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일일이 계문(啓聞)하도록 하여 외람되게 수레를 탄 율(律)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종실록 4권, 헌종 3년 10월 30일 갑술 2번째기사 








[사진] 무호 이한복이 그린 화첩 속에 보여지는 마차 수레의 모습(빨간 칸). 태평거와 같은 마차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누운채로 이동할 수 있어서 그 편의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세도정치 가문중에 하나인 풍양조씨 조영하의 수레였다.





우리나라가 미개하여, 


중국처럼 수레를 이용하지 못했다는 풍문은 거짓이었습니다.


조선전기 세종 임금시절에 마차제도가 있었으나,


폐지되었고 다시 정조 임금 시절부터 제도가 마련되어 


조선 후기에는 고관들의 운송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게 역사적 진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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