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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동진과 전체주의

담장글 읽고 씁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 정말 문제되어야 하는건 "어느 평론가의 허세넘치는 수사"가 아니라, 그 표현을 담론화하는 여론의 태도에 문화전체주의가 숨어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토론하고, 비판하는 것 자체는 유의미하고, 집단지성과 커뮤니티의 순기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주제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이동진의 비평에 대해서, 이것이 유의미한지, 혹은 그 의견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음에 대해서, 혹은 메세지 의미가 지닌 타당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 자체의 먹물스러움, 스노비시함을 문제삼는 것은 대체 어떤 감정을 통해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느냐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이것을 통해 평론가의 자질에 대해서까지 논하는 것은 저에게 잠재적인 파시즘, 이른바 검열의 기운까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려운 단어를 쓰고, 풍부한 수사로 문장을 구성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굳이 사전까지 찾아가면서 어려운 문학책을 펼치는 사람들은 바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요. 왜냐하면 그 화려하고, 언뜻 지적허영에 가깝게 느껴지는 표현들은, 명백한 창작과 언어유희의 영역이며, 또한 예술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비평 또한 제2의 창작임을 고려한다면, 그 문장이 낯설고 어려운 수식으로 가득 찼다고해서 비평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적 재능을 지닌 어린 소년이 사전 속의 낯설고 생소한 단어에 매료되는 것은 지적허영심 때문이 아니며, 새로운 단어들이 이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입니다. 그 낯섬 자체가 우리의 감각을 환기 시키고, 같은 사물도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한줄 평의 메세지가 정말로 타당한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논점은 메세지가 아니라, 메세지에서 느껴지는 스노비시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플로베르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지적허영심으로 가득 차있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그렇게 표현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오히려 그런 표현의 과다함을(일상적 표현에 비하면 상대적인 과다함) 하나의 예술적인 방식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죠. 즉, 비평의 표현 자체가 과다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화자는 단어 하나하나에 자신이 느낀 섬세한 감각들을 최대한 응축해서 표현하려 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 비평 또한 창작의 영역임을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이런 수사에 대해서는 온 몸으로 거부감을 표하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대중문화의 언어에는 화자의 권위에 대한 문제가 숨어있는듯이 보입니다.


햄릿이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라고 할 때, 이것은 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표현 중 하나가 되었죠. 하지만 이것을 문학적 맥락없이 본다면, 지극히 추상적이고 중2병스러운 문장이기도  합니다. 대체 이렇게 상반된 태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바로 화자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삶의 의미 혹은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힌 한량을 보면서, 심오한 사람, 진지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것이 현실에 무감각하며, 헛된 공상에 사로잡힌 사람을 일컫는 지극히 냉소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학자가, 똑같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고뇌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경외와 존경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여기서도 화자의 자격이 문제가 됩니다. 동일한 메세지도 화자의 권위와 자격에 따라서, 그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서점에서 고은 시인의 시집을 찾아 읽던 친구는, 미투 사건 이후로는 더 이상 그의 시집을 펼치지 않습니다. 


그 친구는 시를 소비했지만, 동시에 시인을 소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담장의 글에서 사람들을 어렵고 어색한 표현을 문제삼고 있지만, 어쩌면 문제의 본질은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는(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이든) 깐느 영화제에 출품된 예술영화 보다는, 헐리웃의 박스오피스 영화에 관심이 많으며, 난해하고 어려운 고전 보다는 베스트셀러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호입니다. 이동진에 대한 여론이 유달리 평가가 좋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한줄 평들이 다른 평론가들에 비해 쉽고 담백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표현이, 그 쉽고 담백한 표현의 영역을 잠시 벗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숨어있는 지적허영심을 문제삼기 시작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관심한(동시에 잘 알지 못하는) 문학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표현의 풍부함(혹은 과다함)은 문제시되지 않지만, 영화에 대한 평가는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SNS시대에는 모두가 관객이면서 동시에 평론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핸드폰을 열고, 몇 번만 터치 하면, 우리가 관람한 영화에 대한 비평을 짧고 간결하게 남길 수 있습니다. 그 대다수의 비평은 물론 '사느냐 죽느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영화 엉터리군' 혹은 '참 재밌네요'에 가깝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영화평론가처럼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미묘한 경계점에 서있는 사람들은 대중들의 손쉬운 비판에 노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상승과 하강', '신랄함', '명징', '직조', '처연' 같은 표현이, 아무리 신중한 고심 끝에 선택된 것일지라도요. 우리들 중 상다수는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이 표현들에 대해 비판합니다. 그것이 정말로 타당한 표현인지의 여부는 진정한 논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비평은 명백한 예술의 한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그저 기생충 같은 존재에 불과할지라도요. 


해석이란 이미 그 자체로 주관적이면서, 창조적입니다. 우리는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언어들로, 현실을 이야기했을 때, 이것을 틀렸다, 어색하다, 불편하다고 말했던 사람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로 히틀러와 스탈린입니다. 이들은, 말은 빨간색이 아니다, 나무는 파란색이 아니다와 같은 말들을 지껄였죠. 이것은 색과 사물을 추상적인 색감으로 표현했던 표현주의자들과 청기사파 화가들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수 답게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들의 관점이 사물의 사실성을 포착해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들의 단순명료한 시각과 명쾌함이 곧 진실성을 내포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문제이며, 여전히 비평이 또 하나의 창작의 영토에 발을 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다면, 비평가의 언어표현을 문제삼는 것, 더 나아가서 그의 자질을 문제 삼는 것이 결국 문화 전체주의의 불길한 징조라는 사실을 염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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