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평화로운 날이다.
가을 하늘은 높고, 우마무스메들은 살찌고.
“추석이 다가오는구먼.”
그리고 결혼 후 첫 추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글고 보니 한국 추석은 좀 많이 길제? 이번에 한국 갈끼가?”
“가야겠제? 가족들 다 모이는디 니 소개도 제대로 해야 하고.”
그렇게 말한 후, 덩치가 곰만 한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날에 못 갔는디 이번에도 못 가믄 진짜 들들 볶인다, 볶여.”
설날에는 이사한 후, 집 안 정리하느라 바빠서 안부 인사만 보냈으니, 이번에는 가야 했다.
주말이라 막 집안일을 끝내고 그의 옆에 콕 앉은 타마모 크로스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명절에 빠지는 것도 한 번이면 충분하다 아이가.
”가족들 중에 니 얼굴 한번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꼭 있을 거 같기도 하고.“
결혼식을 진짜 번갯불에 콩 볶는 속도로 진행했기에, 식에 온 그의 집안 사람들은 부모님이랑 동생놈 정도가 끝이었다. 대부분 그가, 트레이너가 결혼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대체 누구랑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 궁금증을 해소해 줄 기회는 역시 명절이다.
물론 그의 본가로 강제적으로 모이게 되는 셈이 되겠지만, 어쩔 수 없다.
트레센에 추석이라고 연차 낸 후에 날아가야 하는 입장상, 다른 데 들를 겨를도 없다. 기껏해야 돌아가신 분들 계시는 납골당 다녀오는 정도지.
”부산에 다녀온 게 엊그제 같은데 또 가겠구마.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한데.“
”냅다 브레이크 없이 본가 가자고 했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다.“
”핫하 그랬제. 한동안 도동놈 소리도 좀 들었고.“
그렇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를 회상하던 중, 타마모는 문득 무언가 걸리는 것을 생각해냈다.
”긴데, 서방아.“
이제 트레이너 대신 서방이라고 기꺼이 부르는 그녀는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이번에 부산에 가면 내 첨보는 가족들한테서 또 도동놈 소리 듣는 거 아이가?“
”아.“
조졌다.
-⏲-
추석까진 그래도 시간이 약간 남아있었다.
이때 뭘 해야 할까.
”타마, 혹시 치수 좀 바꼈나?“
”엥, 그걸 왜 물어봐쌌는데.“
”옷 하나 좀 주문해둘라고.“
그 말과 함께 노트북 화면을 보여줬다.
”한국말로 우마무스메를 말딸이라 카는 건 니도 이제 알고 있다 아이가. 그 말딸용 한복 한 벌 맞출라 칸다.“
그래, 한복 맞추기다.
가뜩이나 국제결혼 도동놈인데 좀 점수 따려면 이런 거 좀 신경 써야지. 기껏 추석 쇠러 갔는데 며칠 내내 들들 볶이는 건 절대 사양이다.
”와 이쁘네, 혹시 청백 조합도 가능하나?“
”가능하지. 나도 한 벌 맞춰야 하기도 하고.“
”오, 좋구마.“
디자인을 스크롤 내려가며 쭉 보던 타마모 크로스는 이내 한 디자인에 손가락을 멈췄다.
”이게 딱 좋네. 근디 주문하면 을매나 걸린다 카기에 지금 주문하는데.“
”보니까 3주 정도?“
”하이고, 시간 촉박하네. 후딱 주문 넣어야 겠구마. 내 사이즈 알려주께.“
간단하게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고는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하얀 번개는 빠르게 자신의 마지막 신체 측정 결과가 기록된 용지가 있는 방의 서류를 찾으러 갔다.
그렇게 한때는 제자였다가 이제는 마누라가 된 우마무스메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화면을 본 트레이너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의는 하얀색, 치마는 파란색이라. 딱 타마모의 색 아닌가. 원단을 직접 보고 고르지 못한다는 점이 좀 아쉽긴 한데, 이건 거리 관계상 어쩔 수 없다.
”보자, 내는 무슨 색으로 해야 할까.“
밝은색 옆에 냅다 갈색 두면 뭔가 이상할 것이 분명하고, 결국 회색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건 타마가 잘 골라주겠지.
어느새 담당 우마무스메 시절보다 더 그녀의 안목을 고려하게 되었다는 걸 모르는 채, 그는 남성용 한복의 목록들을 쭉쭉 내려봤다.
결혼 1년 차.
아직 그는 타마모 크로스에게 손대지 않았다.
이것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트레이너는 그저 빠르게 다가오는 명절에 집중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온다면 일본에서 이것저것 사 갈 것이 좀 있었으니까.
앞날을 모르는 자는 그렇게 명절을 준비하며 한국에 갈 때 사 갈 물건 목록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
추석이란 무엇인가.
설날과 더불어 한국 최대의 명절 아닌가.
그래도 시대가 변하면서 전통 복장을 고수하는 시절은 지나갔고, 대부분 캐주얼한 복장으로 그날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어머니, 아버지를 간만에 뵙습니데이. 건강하셨습니까?“
”아이고, 뭐 이런 옷까지 다 입고. 사돈댁은 건강하시나?“
”네, 건강하십니데이.“
일본 말딸, 아니 우마무스메 며느리가 하얀색과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한복을 입고 뿅, 하고 나타났을 때의 감정은 무어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전보다 한국말이 보다 더 늘었다.
”너도 세트로 맞췄나?“
”안사람이 입으면 저도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같이 나타난 덩치가 곰 같은 장남도 한복을 쫙 빼입었다. 아들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부친은 어렵사리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저렇게 준비하고 온 것 자체가 다 컸다고 느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 안 하겠다고 입에 달고 살더니 이제 아주 유부남 다 되셨어.“
”네게 권유를 하마, 일본 URA 트레이너 과정에 추천서를 써주마.“
”아, 난 자진해서 인생의 무덤에 입소할 생각은 아직 없어서.“
”운명을 받아들여라, 헬스크림.“
”그렇다면 굴단 그 대가는.“
”모든 것.“
반면 동생은 형을 놀리면서 만담을 주고받았다.
형제 사이가 나쁘다고 결코 할 수 없었고, 오히려 돈독했기에 오가는 대화의 와중에 타마모 크로스는 가지고 온 커다란 캐리어 중 하나를 열어서 물건들을 꺼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좋아하실만한 거 최대한 챙겨왔습니데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예.“
그리고 안에서 착착 나오는 물건은 시부모님의 연배에 나름 맞춰서 성심성의껏 그녀가 고른 것들이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오면 자주 찾는다는 물건은 다 있다고 봐도 무방했는데, 그중 묵직한 병이 둘 있었다.
”이건 뭐니?“
”헤헤, 아버님께서 술 좋아하신다는 말을 그이가 해서 말이지예. 일본주랑 위스키를 좀 사왔슴더.“
그 말에 모친은 트레이너를 지긋이 쳐다봤지만, 헛기침을 한 건 부친이었다.
”크흠, 아주 좋은 술을 사왔구나. 한국에선 상당히 비싼데.“
”맘에 드시니 다행입니데이.“
헤헤 웃으며 졸업 후에도 외출할 때는 줄곧 쓰고 다니는 특징적인 청색과 적색이 어우러진 멘코가 씌워진 양 귀를 팔랑거린 타마모는 시어머니에게 드릴 것도 전달했다.
”몸 이곳저곳 쑤시신다는 이야기를 전화 너머로 들어서 말이지예. 파스랑 연고 위주로 좀 많이 사왔슴더.“
”아이고 마, 이런 건 안 사와도 되는 긴데.“
”소화제랑 영양제도 좀 사왔으니 두 분이 꼭 드이소.“
그렇게 다 꺼냈는데도 가방 안에는 여전히 뭔가 비닐봉투들이 많았다.
”뭔가 아직 많네? 뭘 저리 사왔는고.“
”가족들이 얼마나 모일 줄 예상할 수 없어서 일단 가방 하나를 꽉 채워서 그 이랑 같이 사왔슴더.“
그에 대한 물음에 돌아온 답에 모친은 확신했다.
이렇게 꼼꼼하고 마음 좋은 애를 며느리로 들이길 참 잘했다고.
-⏲-
추석 연휴 전날 본가에 도착해서 연휴가 시작된 날부터는 타마모 크로스는 생전 처음 겪는 한국 명절에 대한 체험을 해야 했다.
그리 큰 규모로 하는 제사가 아님에도 일단 전을 부친다. 생선을 굽고, 나물을 무치며 탕국을 끓인다. 닭하고 돼지고기도 삶아야 하고, 산적도 구워야 하고 여러모로 손이 갈 일이 많았다. 일반적인 이 시대의 며느리라면 진짜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겠지만, 타마모 크로스는 이를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한국 요리의 조리법을 싹 체득하고 돌아갈 기회.
가장이 한국인이니 한국인의 밥상을 종종 차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는 입맛을 크게 안 타서 김치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 가능하다고 하는 심플한 취향이었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넘길 순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선 계란 나물이라는 것도 있대예“
”뭐꼬 그건. 계란으로 나물이라꼬.“
”예, 근데 여기서 진짜 나물을 다뤄보니 뭔기 심히 잘못된 작명이라는 걸 알겠슴더.“
종종 타마모 크로스의 입에서 나오는 충격과 공포의 일본식 한국 요리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손을 멈칫하게 할 정도였다.
문제의 괴상한 나물부터 시작해서, 김치라고 파는 걸 시키면 나오는 달달한 맛의 정체불명의 배추무침까지.
”그딴 걸 한국 음식이라 팔드나?“
”진짜배기는 시장 안 한국 반찬 가게서 팔긴 하지예. 근데 다수가 저 꼴임더.“
피자 위에 파인애플이 올라가거나, 잘 우려낸 에스프레소를 얼음물에 다이빙시키는 걸 보고 절규하는 이탈리아인의 심정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된 이들은 몸서리쳤다. 저러니 1년에 한번이라도 김치 보내달라고 하지.
”근데 사온 물건 개안았심꺼? 다들 딱히 말씀이 없으시길래.“
”아이고, 걱정 말그라. 다들 너한테 관심이 확 쏠려 있어서 그런 거니께.“
그렇게 말하던 도중, 문득 타마모 크로스가 한 말에 모친은 가벼이 손사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명절에서 슈퍼스타는 타마모가 되었으니까. 물론 남편이 된 트레이너한테 ‘이런 쪼끄만 애랑 결혼했다고? 너 도동놈이 아니라 짐승이냐?’라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자신의 여권으로 생년월일을 까버리는 건 잊지 않았다. 성인 여성 중에 늘씬하고 키가 작달막한 부류일 뿐이라고. 물론 그래도 ‘짐승은 아니고 도동놈은 맞네’라는 말은 피할 수 없었다.
지도하던 학생하고 결혼한다는 거, 좋은 인식이 박히긴 어렵다. 진짜로.
이걸 타마모 특유의 붙임성으로 죄다 희석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거지, 그나마도 없었다면 진짜 면전에 짐승 소리 날아들었다.
다소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금세 익숙해진 한복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도 일단 점수 따는 데에는 대성공하는 요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타마모 크로스면 옆에 일본에서 뛴 말딸 아이가?’
물론 그녀의 이름을 조금이라도 들어본 이들도 있었다.
주로 우마무스메, 아니 한국식으로 말딸 자녀가 있거나 인연이 있어서 종종 옆 나라 시리즈 소식을 듣는 이들이 가족 중에도 있었으니까. 그런 이들은 ‘워매 그런 애랑 결혼했다꼬’라는 반응으로 귀결되었다. 그야 시리즈에 돌풍을 불러오고 재부흥까지 일으키는 데 일조한 애를 지도했고, 그 애가 졸업하고 나니 들이받아서 결혼했다는 건 범상치 않은 이야기니까.
아무튼 추석 내내 주요 주제는 국제결혼 한 장남이 되었고, 그녀 또한 주인공이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글고보니 일본으로 가는 표는 언제라 캣제?“
”오늘 밤임더. 주말이 껴있긴 한데, 일본은 추석 연휴가 없으니 돌아가서 그 사람은 출근 준비해야지예.“
물론 추석 당일 저녁 표로 다시 나리타 공항으로 날아가야 했지만 말이다.
연차 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얼른 돌아가서 일상 복귀 준비해야지, 암.
…
”타마, 집에 왔는디 왜 그걸로 입고 있나.“
”왠지 느낌이 묘- 해서 말이제.“
그리고 돌아온 날 밤.
”아무래도 내도 더는 한계인 기라, 잘 먹겠데이.“
”잠시, 잠시만, 나 내일 출근!“
”저항하면 다친다 안 카나. 천장 얼룩이나 보고 있을래?“
”야이, 도배 새로 다 했는데 얼룩이 어디있-. 그아아악!“
곰탱이 꼴리건은 하얀 번개에 무자비하게 먹혔다.
그것도 한복 차림으로 스믈스믈 기어 오는 그녀에게.
첫 부부관계가 한복 차림이라는 무언가 이상한 건 둘째 쳐도, 이 한 방은 실로 놀라운 적중률을 보였으니.
”에-. 왜 한 방에 두 줄이 뜨는 기고.“
타마모 크로스, 임신.
참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추석 소재로 쓸만한게 붓싼 또레나 밖에 읎었다.
기카모 우얄수 업는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