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8343240
필자는 이상의 역사글에서 중대한 실수를 범했습니다.
실수를 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획물과 포로를 나누는 동시에 누르하치는 본인이 잡은 포로들 중 일부를 차출하여 명나라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전쟁 선포와 그 전쟁의 명분인 칠대한을 알리고자 했다. 누르하치는 후금의 기록상 16명의 상인들에게 노자와 함께 자신의 국가 창건, 전쟁의 개전, 칠대한의 명분이 쓰여져 있는 서한을 쥐어주고 요동 깊은 곳으로 가서 해당 문서를 전하게 했다.5
후금의 기록만 보자면 이는 국내에 대한 전쟁 개전선언에 이은 명나라에 대한 정식적인 선전포고라고 볼 수 있다. 후금의 기록상에서는 포로들에게 칠대한이 적힌 서한을 쥐어주고 명나라로 보냈다고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기록과 함께 살펴보자면 누르하치의 해당 행동은 선전포고의 역할을 겸하여 명나라에 대한 화친 및 협상을 제안하는 행동이었다.6
누르하치는 해당 서한에서 자신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열거하며 명나라에 지금까지 쌓인 갈등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는 동시에 자신의 전쟁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피력하였다. 그러는 동시에 명나라에 전쟁을 끝낼 방법으로 명나라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외교관계를 설정하길 원했다. 여기서 누르하치는 사실상 명조가 자신의 건국을 인정하고 자신의 여진 통합 역시도 인정하기를 원함을 피력했다.
이 때의 누르하치의 서신 전송에 대하여, 누르하치가 명나라가 자신의 공격에 대해 대응태세를 갖추어 역습을 해오는 것을 늦추기 위해 외교적 기만책을 사용했다는 논지가 많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그러한 목적만을 가지고 서신을 송부한 것은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 요컨대 누르하치는 복합적인 목적으로 해당 서신을 발송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목적은 기만책의 사용과 더불어 가능하다면 이번의 무순 전역(戰役)으로 말미암아 명나라와의 전쟁을 끝내고 명나라와 새로운 외교관계를 설정, 이후 여허를 병합하여 여진을 통일하려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이전에도 언급했다시피 냉정하게 보자면 이 시기의 누르하치가 요동 진공 및 점유를 계획하거나, 더 나아가서 북경을 점령하고 중원을 차지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꾸몄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당시 누르하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여허의 병합과 그를 통해 완성되는 여진의 통일, 여진의 독자 국가 완성이었다.
그렇기에 당시의 누르하치로서는 명과의 전쟁은 빠르게 끝내면 끝낼 수록 이득이었다. 명과의 전쟁이 장기화되거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 예컨대 명의 전력이 요동에 집결한 상황에서 명과 여허간 공조가 강화되어 전선의 교착상태가 지속되거나-혹은 대규모의 원정군이 후금을 공격해 온다거나 한다면 여허 병합의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오히려 후금의 국운을 걱정해야 될 처지였다.
따라서 누르하치는 이 번의 전투를 통해 자신의 힘을 보인 뒤 그에 이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나라에 전달함으로서 명의 정벌을 늦추고, '가능하다면' 명과 여허간 공조체제를 차단하고 여허를 병합, 명으로부터 통합된 여진의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해당 서신을 전송하면서 의아한 행동을 보였다. 당시 누르하치가 보낸 서신에는 '남조(南祖)'라는 표현이 쓰였다. 이는 이전에 조선에 보낸 서신에 쓰인 표현과 일맥상통하다. 화친을 원한다면서 명나라를 상대로 한 서신에 이런 대범한 표현을 쓰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는 명나라를 상대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압박을 가하여 명나라가 본인들의 요구를 수용케 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는 명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당시 전황이 비록 명이 기습을 허용하여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사실 명으로서는 전체 판세상 그리 밀리는 것이 없었다. 이전 송나라 시기의 정강의 변이나 명초 토목의 변(土木之變)마냥 황제가 사로잡힌 최악의 상황도 아니었고, 수도 북경이 함락당하거나 포위된 상황도 아니었으며 하물며 요동이 넘어간 상황은 커녕 대군이 전몰한 대패상황도 아니었다. 타격을 받은 것은 고작 무순, 동주, 마근단, 그외 주변 진보와 농장, 마을 정도에 불과했으며 병력 피해나 지휘관 손실 역시 명의 국력을 생각해보자면 비율상 피해가 크진 않았다. 물론 절대적 피해량은 앞서 언급했듯 막대하여 절대 무시 못 할 수준이었으나 명의 국력 대비 비율상으로는 충분히 감당가능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누르하치의 무도한 표현을 인정하고 그와 화친을 맺는 것은 천조(天朝)의 자긍심을 지니고 있는 중원지배국가 명에서 불가능했다. 오히려 오랑캐 추장의 무도함을 지적하며 복수를 부르짖어 마땅한 상황이었다. 이런 부분을 생각해 보건대 누르하치의 행동은 다소 의아스럽다. 대명외교에 수십년간의 경험이 쌓인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다만, 이 부분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서신상에서 누르하치가 스스로를 완전히 낮추는 동시에 명이 자신의 여진 지배권을 인정해주면 다시 명에 공순히 행동하겠다고 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러한 누르하치의 의사가 명에 의해 수용되었을지는 불확실하다. 오히려 공격에 성공하고서 그런 태도를 곧바로 취한다면 후금 내부-즉 누르하치 휘하 암반들 사이에서 누르하치의 행동에 대한 의구심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만큼 차라리 칠대한을 언급하고 남조라는 표현을 쓰며 강한 어조로 명을 상대로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요구만 수용되면 다시 명을 상대로 태도를 낮추겠다는 모습을 보이는, 강경책과 유화책을 함께 쓰는 행보를 보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대의 외교적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누르하치의 해당 서신 송부는 비단 기만책이라고 단정할 행동이 아니라 화친의 가능성을 열어둔 외교적 조치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그러한 서한을 보낼 당시 이미 요동의 명군은 '감히 천조에게 검을 뽑아든 건방진 오랑캐 추장'을 토벌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해당 내용 전체가 사료의 인용과 연결, 교차검증의 문제로 말미암아 제가 사죄드릴 부분입니다.
이전에 필자는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4월 25일 기사에 실려 있는 누르하치의 포로 한인 장유신 등의 석방 파견과 '건국, 칠종뇌한, 화친'의 의도를 담은 서한의 전달이, 『만문노당』외의 후금/청측 사료에 실려 있는 이상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이해했습니다. 1618년 4월 16일에 상인들에게 '칠대한이 담긴 서한'을 맡기고서 그들을 석방했다는 후금측의 기록과, 그로부터 9일 뒤인 동해 동월 25일, 후금측이 '칠종뇌한(칠대한)'과 건국, 자신의 즉위를 알리며 자신의 전쟁명분을 선전하는 동시에 화친의 의사를 제안했다는 명측의 기록이 기록상 맞물려 부합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학자 장정수 역시, 후금의 해당 조치를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누르하치가 무순을 함락한 뒤 4월 25일에 명에 서신을 보내며 해당 서신에 건국의 사실과 칠종뇌한을 열거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누르하치의 장유신을 통한 화친 서신의 송부를 명의 정벌을 늦추기 위한 기만전술이라고 이해했으며 필자는 여기에 더해 가능하다면 실제적인 외교 관계 수립과 명 조정의 후금의 위상, 권위 인정의 의도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료를 통해 해당 사건을 해석해 볼 때, 만력 46년 4월 명 조정 내지는 요동아문 측은 공식적으로 후금의 '국서'라 할 만한 외교적 서한 전달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는 1618년 4월 무순 전투 직후에 있었던 후금의 포로 상인들에 대한 노자 지급과 칠대한 선전 요구와, 신종실록에 기술된 후금의 장유신의 파견 및 화친의 제안은 서로 다른 일시에 이루어진 사건이며, 단지 여러 조건들이 맞물리고 부합하여 동일한 사건으로 보였을 뿐으로 판단을 수정합니다.
그것은 추후 정확한 보론의 글을 통해 수정하겠으나, 그 대표적인 근거는 만문노당 윤 4월 22일의 기사와 '동이고략', '삼조요사실록', '명계북략', '명사기사본말보유'의 기록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밖에 '명신종실록'과 '국각'에서는 장유신의 석방과 후금의 외교 접촉을 4월로 기술되고 있으나, 이는 명신종실록의 오류와 그것을 답습한 국각의 오류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을 통해 실제적인 국서를 보낸 것이 아닌 만큼, 누르하치의 상인 포섭은 외교 행위라기 보다는 군사 행위에 가까웠으며, 그들에게 문서를 맡긴 것 역시 '명 조정 내지는 아문에 대한 송부'가 아닌 '살포' '선전'이라고 보기에 합당합니다.
명의 상인들을 통해 요동 지역으로 보내진 후금의 포고에, 칠대한/칠종뇌한 외에 무슨 내용이 기술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명의 기록에 그 단서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칠대한 자체가 후금의 전쟁 대의명분의 집합체인 만큼, 그 밖의 내용 역시도 후금의 명분을 드러내고 항복이나 협조를 권유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상인들은 후금으로부터 선전에 대한 대가로 노자까지 지급받긴 했으나, 실제로 자신들이 후금의 명분을 선전했다가는 요동아문과 명군에 의해 이적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처형될 것을 두려워 해 대부분 후금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설사 몇몇 상인들이 실제적으로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극소지역에만 알음알음 퍼진 덕에 덕분에 명에서도 해당 사건이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상인들을 통한 칠대한의 선전으로 누르하치가 기대한 것은 아래와 같이 유추됩니다. 명 조정이나 관부에 보낼 의도로 상인들을 포섭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해당 선전은 외교를 통한 화친이나 명의 군사대응 지연등의 의도라기 보다는 명의 요동 지역 군대와 지역민들을 상대로 한 심리전의 의도가 보입니다. 그런 만큼 공포의 조장을 통한 사기 저하와, 선전을 통한 요민(遼民) 내지는 명에 투속한 여진인들의 후금 귀부가 누르하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실제로 명-특히 요동에는 여진인 내지는 몽골인 출신이거나, 아니면 혈통/가문으로서 귀부하거나 협력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누르하치가 상인들을 석방한 4월 16일로부터 5일 뒤에 벌어진 요동총병 장승윤(張承胤)과의 전투에서 상대한 명군 중에는 이정(夷丁) 역시 다수 존재했기도 했습니다. 경계인으로서 명의 요동 체제에 협력하고 내속된 퉁기야(tunggiya)/동(冬)씨 가문은 그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누르하치는 무순을 침공하면서 해당 일족의 상인으로서 무순에서 장사를 하던 동양진(佟養眞)과 동양성(佟養性) 등 여진 혈통의 귀부자들을 포섭하는데에 성공하기도 했던 만큼, 그 자신감의 고취로 명에 투속한 여진 내지는 몽골 혈통, 명의 입장에서 경계인으로 생각될 만한 이들을 포섭하는 것을 시도할 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명에 불만을 가지거나 후금을 두려워하는 요민들 역시도 그의 포섭 대상으로 고려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후금에는 인력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점령지이던 무순의 항복 한인들 역시도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내속시킨 만큼 후금의 선전에 한 명이라도 자발적으로 귀부한다면 나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편 공포와 압박의 측면에서, 후금의 선전은 요동 변장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는 명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에게 실제적인 위협으로 와닿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만력 46년 6월 강서도어사 설정(薛貞)이 언급하는 양호의 상주에서, 당시 요동에 배치되어 있던 명의 지휘관들이 후금의 기세에 대단히 두려워 하면서 전투를 회피하거나 전출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빈번히 타세력과 충돌해 온 요동의 명군이 이렇게 급격히 사기가 하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후금에 의해 그때까지 쌓인 직접적인 교전 결과에 의한 바이기도 할 테지만, 후금의 선전에 의한 바로 인한 동요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누르하치는 명의 변경 방어를 약화 시키거나, 나아가 명군의 이탈과 항복을 유도하고자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618년 5월의 2차 대명 침공에서 보여지는 송산둔(松山屯/崔三屯)의 항복은 항장 이영방(李永芳)의 설득과 후금의 직접적인 군사적 기세의 역할도 컸을 테지만, 이런 선전의 효과 역시 조금은 작용했지 않을까 추정합니다.
그렇기에 이 글을 빌어 심심한 사과를 올리며, 앞으로는 더 주의 깊게 역사를 바라보겠습니다.
본 글을 작성하는데에 쓴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맹삼, 1930, 『청조전기』중국어판.
장정수, 2020, 「조선의 대(對)명 후금 이중외교와 출병(出兵) 논쟁의 추이」, 『한국사연구』 191, 한국사연구회
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임경준, 2021, 「明代의 衛所軍官에서 淸代의 八旗旗人으로 — 퉁기야(Tunggiya)~撫順 佟氏 일족의 사례를 중심으로—」, 『만주연구』 31, 만주학회
사죄글에 왕찌찌 섹시 밀프 짤이 없는거 보니
진정성이 의심됩니다
아...음...아 그렇군요!(모름)
사죄의 대가로 알몸댄스가라
루근l웹-1234567890
2025/01/26 12:58
사죄글에 왕찌찌 섹시 밀프 짤이 없는거 보니
진정성이 의심됩니다
돌프른
2025/01/26 12:59
아...음...아 그렇군요!(모름)
아알호메프
2025/01/26 13:00
음....아...그렇구나 뭔지 이해함(이해 못함)
비바[노바]
2025/01/26 13:01
죄송합니다
님이 틀린게 맞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보스트로얀
2025/01/26 13:01
.... 마! 알고 있었는데 작성자가 쪽팔릴까봐 말 안한기다!
크흠 담부턴 어? 그 사료해석을 어? 똑바로 하고말이야 어?
네모네모 고먐미
2025/01/26 13:02
....
Ragazuel
2025/01/26 13:02
왜이리 혀가길고 사죄의 진심이 없음
윗 댓처럼 왕찌지 짤이없어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음
침묵군
2025/01/26 13:02
으아악 고봉밥
코가네이 니코🐯
2025/01/26 13:03
사죄의 대가로 알몸댄스가라
하나코둘코삼코넷코
2025/01/26 13:04
뭔지는 모르겠고 야시시한 짤이나 올려주세용
야황 육손
2025/01/26 13:05
에..? 아..네..
루리웹-8178667771
2025/01/26 13:05
요약이 없는데 베스트로 올리다니 이 무슨... 동참해야할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