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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사) "다들 왜이러시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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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출처 : 칼부림. 니루 어전 함이의 군법 위반자 처분.

 

 

 

후금사 모음집

 


1618년 4월, 누르하치의 칠대한 선언을 기점으로 후금은 명나라를 최초로 침공했다. 4월 13일 허투 알라(hetu ala)를 출정한 2만여명의 후금군과 그 연합 세력들은 무순(撫順), 동주(東州), 마근단(馬根單)등을 공격했고, 무순의 유격 이영방을 항복시켰으며, 동주의 수보 이홍조(李弘祖)를 사살하고 마근단의 수보 이대성(李大成)을 포로로 잡았다. 그 외에 930여명의 명군 병사가 후금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전사자들까지 합친다면 그 피해 규모는 더욱 클 것이다.


뿐만 아니라 4월 21일에는 누르하치를 막기 위해 출병한 요동총병 장승윤(張承胤)과 그 휘하의 장령, 병력 역시도 궤멸시킴에 성공하여, 누르하치는 빛나는 전훈과 막대한 물리적 이익을 모두 도모하면서 명에 대한 첫 출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첫 원정이 단 하나의 오점도 없이 모두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명에 대한 첫 원정이라는 사실, 그리고 막대한 전쟁 이익은 병사들과 장령들의 감정을 고조시켰고, 그것은 곧 그들 중 일부가 군법을 어기는 상황을 초래했다. 누르하치가 강력한 군법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병사와 장령들은 사사로이 군율을 어기고 함부로 행동함으로서 누르하치로 하여금 눈살을 찌뿌리게 했다.


누르하치는 허투 알라로 복귀한 뒤 군율을 어기고 사사로이 행동하여 군대와 전략에 폐를 끼친 이들에 대해 처벌을 단행했다. 이 때 공식적인 처벌 대상자는 병사 2명, 잘란 어전(순자 니루 어전 jalan ejen/sunja niru ejen) 4~5명, 니루 어전 1명 이었다. 이런 처벌 형식과 사례를 보건대, 당시 누르하치는 병사들의 경우에는 중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직접적인 심판과 처벌을 유예하고, 대신 중형을 저지른 이들은 확실하고 강하게 처벌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중견급 지휘관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군법을 적용하되 병사들보다 직접적인 처벌 수위 자체는 낮은 형벌을 내려 균형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1


이렇게 처벌을 받은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극형을 받은 인물은 아키(aki)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였다.  그는 무단 이탈과 무단 약탈을 저지른 데다 아군의 손실까지 초래한 죄과로 능지형에 처해졌고, 그 시신이 팔기의 니루들에 조리돌림 당하여 군율의 지엄함을 상기시키는데에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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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새끼 순 나쁜 새끼에요!"

 


그런데 그의 죄과에 대해서는 분석이 갈릴 수가 있다. 아키가 저지른 행위의 서술에서 이견이 갈릴 소지가 있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선 아키가 저지른 일에 대한 『만문노당』과 『구만주당』의 서술을 보자. 


기록에 따르면, 아키는 샄다(sakda)의 슈사이(xusai) 니루 소속이었는데, 전역이 진행되던 도중 자신의 니루로부터 이탈하여 무단으로 약탈을 하였다. 그는 민가로부터 약탈한 것으로 추정되는 닭을 구워 먹고자 했는데, 그것을 알아 보고 접근한 다른 후금군 병사 네 명과 함께 닭을 구워 먹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그들은 후금군이 변경을 침공한 상황에서, 전역 지역의 자세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보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하(淸河) 소속 명군 정찰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이 교전에서 아키는 가까스로 살아남는데에 성공했지만, 곧 그의 여러 군율 위반 행위가 보고되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다.2


사건의 단서를 추합해 보건대 해당 사건은 무순이나 동주, 마근단등 후금군이 공격한 요새 경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주변 지역의 공략 과정에서 벌어진 약탈과 소규모 교전으로 보인다. 당시 후금은 명의 농장이나 농경지, 돈대 역시도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 때 쟁점이 되는 것은 첫째로 아키 외 네 명의 후금군, 그리고 청하에서 파견된 명군 부대간 충돌에서 발생한 인명 살상의 주체며, 두 번째는 살해된 인명의 숫자다. 


첫째로 살해 주체다. 『만문노당』에서는 이 때 아키 이하 후금군과 명군이 조우한 일을 서술하면서 'niowanggiyaha i cooha acafi sunja niyalma waha seme' 라고 서술한다. waha는 '죽였다'로 해석되는데, 그렇게 되면 살해의 주체가 아키와 후금군이 된다. 이렇게 된다면 도리어 후금 병사들이 청하에서 나온 명군 병사들을 죽인 것으로 사건을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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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공을 세웠는데 처형 당하는 거야?!)

 

 


하지만 해당 기사를 아키와 다른 후금 병사들이 자신들과 조우한 명군들을 죽이고 그들을 격퇴했다고 해석한다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는 아키의 처벌 수위다. 무단 이탈과 약탈을 했다 할지라도 명군을 격퇴했다면, 아키의 죄가 경감되어 처벌 수위가 '능지 후 조리돌림'이라는 강력한 처벌보다 낮아졌을 공산이 높다. 


누르하치는 출병 전 군령 포고에서 잘란 어전과 니루 어전의 관리와 통제에서 벗어난 병사를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3 그러나 아키가 만약 그런 공을 세웠다면 목숨은 살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포고를 지켜 아키를 처형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능지 후 조리돌림'이라는 극형은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후금의 기준에서도 대단히 큰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두 번째로, 아키와 후금 병사들이 명군을 격퇴했다면 반대로 아키와 함께 닭을 구워 먹은 후금 병사들은 생존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도 복귀 후 무단 이탈과 취식의 죄를 받아야 하는데, 이들은 아키와 달리 처벌 기록이 없다. 아키가 처벌을 받았다면 이들 역시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이들의 처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언급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구만주당』을 살펴보면, 노당과 대응되는 동일 기사의 삭제 문구에서 wabuha라는 문구가 보인다. wabuha는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이를 반영한다면 당시 교전에서 후금군이 명군 정찰대와의 교전에서 사상자를 내고 패전했다는 뜻이 되게 되며, 사건의 구성에 문제가 없게 된다. 


노당에서의 waha의 쓰임으로 인해, 본 사건을 자칫 아키를 비롯한 후금 병사들이 무단 약탈 도중 자신들과 맞닥뜨린 명군을 격퇴한 것으로 볼 여지가 생겼으나, 실제로는 사건서 후금의 병사들이 여럿 전사하였고 그로서 아키가 더욱 엄정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기사에서 wabuha가 지워지고 waha라는 단어가 남은 이유는 알 수 없다. 후금군이 다수 전사했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살해 주체를 왜곡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해당 기사는 아키가 저지른 잘못과 그에 대한 처벌과 관련한 기사로서 후금군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기에 그럴 가능성은 적다. 문장을 보다 간결하게 하기 위해  죽였다는 표현만을 남긴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된다면 아키가 '죽였다'는 것은 명군이기보다는 자신의 전우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두 번째 쟁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교전에서 살해된 인명의 숫자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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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은 너무 많이 죽은 것 같소. 네 명으로 합시다."

 

 

기사를 다시 보자. 'sunja niyalma waha seme'라는 문구에서 보이듯, 당시의 교전에서 전사한 이들은 총 다섯 명(sunja niyalma)이다. 그런데 전투 중에 죽은 이들이 모두 후금의 병사들이라고 한다면, 당시 사건에 휘말린 후금군 병사 다섯이 해당 교전에서 모두 전사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아키는 현장에서 생존을 하는데에 성공했고, 이후 동년 4월 26일에야 처형되었다. 


아키가 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점,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다른 후금 병사들은 이후 처벌 기록이 없는 점을 생각해 보자면 당시 사건에 휘말린 후금병사들은 당시 전투에서 총 4명이 죽은 것이 된다. 그런데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모두 후금군이라면 현장에서 5명이 죽었다는 기사와는 기록이 대치되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오기이다. 만약 사건에서 전사한 것이 후금군 뿐이라면, 기록에는 다섯 명이 아닌 네 명이 죽었다고 기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록자들이 당시 사건에 휘말린 후금군의 총 인원이 다섯 명이라는 점만을 인식하고, 아키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가 후에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식에서 배제했다면, '전사한 후금군의 숫자'에 '사건에 휘말린 후금군의 숫자' 를 그대로 인용해 기술해 버렸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당시 현장에서 명군 병사 역시 전사했고, 해당 명군 전사자 역시 사망자에 일괄적으로 포함되었을 가능성이다. 


당시 아키외 후금군이 조우했을 명군은 일단의 부대였으므로, 규모 면에서 후금군보다 우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건에 휘말린 5명의 후금 병사들 중 아키만이 생존하고 나머지는 전원 전사했을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리 후금군 개개인의 역량이 우수하다고 해도, 적군 에 비해 숫적으로 불리하기 까지 한 와중에 취식 상황까지 겹쳤다면 승리 또는 성공적인 퇴각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저항의 와중에 한두명의 명군 정도는 죽이거나 상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만큼 싸움의 와중에 후금군이 명군 병사 하나를 죽였고, 그것이 아키의 진술에 의해 사건에서 죽은 인명에 포함됨으로서 당시 사건에서 후금군과 명군의 구분 없이 총 다섯 명이 죽었다고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


특히 『구만주당』 상에서 삭제된 wabuha라는 표현을 복구하여 기사에 남은 waha와 병존시킨다면, 문맥상 죽이고 죽였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해당 기사는 무단 이탈한 후금군 다섯 명과 명군 부대가 조우해 서로 죽고 죽여 후금군 4명, 명군 1명이 전사했다는 기사로 읽을 수 있다. 다만 기사상에서 waha가 wabuha와 병존했다가 wabuha는 삭제되고 waha만이 남은 것인지, 아니면 wabuha가 waha로 대체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기에 확답은 힘들다. 따라서, 두 가지 가능성 중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당시의 사건을 결론내리자면 이렇다. 당시 명으로 출정한 후금군 중에서, 아키라는 병사가 소속 니루와 니루 어전의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무단으로 약탈과 취식을 하다가 다른 후금군 병사 4명과 함께 약탈한 음식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이윽고 청하에서 출격한 소규모 명군 부대와 조우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키를 제외한 다른 후금군이 전멸했으며 아키는 목숨만을 건져 도망쳤다. 여기서 후금군이 저항 과정 중 명군을 죽였거나 상해를 입혔을 수 있으나 그것은 확실치 않다. 


아키는 현장에서 도망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곧 후금의 대명 공격이 끝난 뒤 허투 알라에서 그 죄를 단죄받게 되었다. 그는 무단 이탈과 약탈, 그리고 몰지각한 행동으로서 아군의 손실을 초래했다는 죄로 능지형을 언도 받고 처형, 군법의 지엄함에 대한 경고의 징표로 삼아졌다. 아키가 당한 처벌은 당시 후금군이 군법 위반자에 대해 실행한 처벌 중 가장 큰 형벌이었다.




1.이에 대해서는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9122792 참조.

2.『구만주당』 /  『만문노당』 무오년/천명 3년 4월 26일.

3.『만문노당』 무오년/천명 3년 4월, sunja nirui ejen, nirui ejen henduci donjirakv fakcafi yabuci yabuha niyalma be wam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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