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투는 갑론을박이 원래 많은 전투이니
내용은 진지하게 보지 마시고
재미로만 봐주시길 바랍니다
1592년 음력 4월 28일
탄금대 전투
3일전인 음력 4월 25일 있었던
상주전투가 허망하게 패전하고 경상도가 완전히 적의 손에 넘어갔다
도순변사 신립은 조선 팔도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도순변사 신립,
자타공인 조선 최강의 맹장으로 칭송받던 그는
북방에서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활약상을 쌓아왔으며,
조선 건국이래 최고의 위협이었던 여진족 니탕개의 난도
큰 공을 세우며 진압하는 등 선조의 총애도 한 몸에 받던 장수였다
1591년, 왜의 침공 분위기가 조선을 무겁게 짓누를때
비변사와 신립은 조선 수군을 폐하고 육군을 집중 육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왜구들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다는 이유였다
흐르는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는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비변사와 신립의 판단은 정당했다
을묘왜변 당시, 판옥선이 아닌 맹선을 주력으로 사용하던 조선 수군은
재빠른 왜구들의 선박들을 따라잡지 못했으며, 소규모 교전에서도 계속해서
피해를 강요받았었다
하지만 왜구들이 상륙했을때는 조선육군이 왜구들을 압도하였었다
후에 개발된 신형 전함 판옥선 역시 흥양왜변에서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한 것이
이런 판단에 더욱 부채질을 가하였다
따라서 비변사와 신립은 수군을 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극렬반대로 인해 겨우 무산되었다
이렇듯 신립의 전략 전술에 대한 시각은 순변사 이일보다도 못한듯 보였지만,
그 무력만큼은 조선 최고임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였다
허나, 이번의 상대는 한낱 왜구들이 아닌 10년여간의 경험을 쌓은 노련한 왜군이었다
음력 4월 26일
북방에서부터 따라온 신립 장군 직속의 정예 궁기병대와 한양에서 지원받은 병력이 도합 8천
남하하며 꾸준히 모병한 병졸의 수가 대략 8천
총합 1만 6천의 대군이 충주에 도착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이 전쟁 발발 초기 수십일 안에 가용할 수 있는 최대의 병력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종사관 김여물이 지형이 험한 조령(문경새재)에서 싸울 것을 권했으나
신립은 자신의 기병대가 충분히 활약할 수 있도록,
산세가 험한 조령이 아닌 충주성 옆의 평야지대인
달천 평야를 격전지로 선정하였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기마대의 활약을 기대한 것도 있지만,
조령(문경새재) 이외의 진격로 역시 왜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로서는 최대한 단기간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세를 깨부수어
방어작전에 시간을 크게 할애하지 않고,
다른 왜군 부대를 요격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근세시대의 기마병과 일반 보병의 전력비는 약 3:1
대부분의 병력이 보병이었던 왜군과 비교해보면
겉으로 보기엔 조선군의 우세였다
일반적이라면, 그리 틀린 판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틀린 판단이었다
달천평야는,
질척질척한 논두렁이었다
거기다가 왜군이 조령을 넘었다는 보고를 올린 군관을
그냥 처형해버렸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왜군이 다른 진격로를 통하여 충주로 진입하여
포위될 것을 걱정하던 자가 저질렀다고 보기엔 이상한 일이었다
이는 상주전투에서 이일이 어쩔 수없이 농민을 처형한것과는 대비되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거기다가 자신의 선배이자, 상주에서 왜군과 직접 마주친
순변사 이일의 조언을 싸그리 무시한다
이일은 북도 제승방략제를 재정리하는 등 전략 전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실력 또한 자신과 비등하면 비등했지
결코 부족한 자가 아니었던 만큼 결코 이일의 조언은 무시할 수 있는 조언이 아니었다
그 실력과는 별개로,
굉장히 거칠고 오만했다는 신립의 성격이 증명된 것이다
음력 4월 28일
한반도의 정규군과 일본의 정규군이 맞붙은
몇안되는 대규모 회전이자,
조선군이 시도한 몇 안되는 대규모 회전인 역사적인 전투가 시작했다
신립은 자신의 기마대를 좌우로 펼친 반월진으로
고니시의 군세를 포위섬멸하려 시도하였다
1차 돌격으로 1천의 기마대가 고니시의 군세를 덮쳤으며,
고니시의 군세는 기병대의 돌격에 결국 후퇴를 감행하였다
신립은 이 기세를 몰아 고니시의 군세를 섬멸하려 하였다
그는 눈 앞의 7천의 고니시부대만이 적의 주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전장의 좌우에서 소 요시토시와 마츠라 시게노부의 매복병이 등장하였다
신립은 2차 돌격을 통해
적부대를 뚫으려 시도하였으나,
그렇지 않아도 돌파력이 약한 궁기병대인데다가
질척질척한 땅에 의해 돌격력이 순식간에 저하되었고
결국 조총병들의 사격에 의해 큰피해를 강요받는다
신립은 결국 충주성으로 후퇴하려 하였지만,
아리마 하리노부가 이끄는 별동대가 이미 성을 점령한 이후였다
이후의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조선군은 북쪽으로 하염없이 밀려 탄금대에 도달했으며
신립은 마지막에 수십의 왜병을 도륙하였으나 끝내 전사하였으며,
종사관 김여물 역시 전사하였다
신립의 1만 6천의 부대는 전멸했다
군사학상에서 말하는 30%의 전투불능이 아니다
99%의 병력이 전사한, 말그대로의 전멸이었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상급병사들은 매우 용감하고 대담했다. 조선의 장수 하나를 생포하였는데, 석방을 약속하자
오히려 자신의 목을 베라 하였다. 결국 그 요구에 응하여 목을 베었다"
라고 한다
이 장수는 충주목사 이희립으로 추정된다
신립의 부대가 너무 빨리 궤멸되는 바람에 북상 중이던
전라도의 병력은 합류조차 하지 못하였다
조선의 최종방어선이 무너졌고,
조선의 희망 역시 무너졌다
낙담에 빠진 선조와 조정은 결국 몽진을 택하게 된다
기나긴 7년 전쟁이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전투였다
예전부터 생각한건데 임진왜란에 대해
엄청 자세하게 글 올려주는것 같아 좋다
반지의 제왕 글도 재밋지만 우리나라 역사는 별 관심 없어 하는것같던데
글을 잘써줘서 그런가 요즘엔 우리나라 역사도 베글 잘가서좋은 ㅎㅎ
치킨값 비교인줄 알았는데 당황스럽네
VS글 강등.
부연설명
1. 수군폐지를 왜 요청했는가?
수군은 건조와 유지에 막대한 자금이 들고, 설령 수군이 멀쩡해도 수군의 근거지인 항구가 점령되면 그대로 와해됨. 이 때문에 수군폐지 주장이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느니 하는건 비약에 가깝고, 실제로도 이치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면 전라도가 넘어가서 이순신도 활약 못했을 가능성이 큼. 이치전투의 승리와 이순신의 활약으로 수군이 하드캐리하긴 했는데, 수군폐지 요청가지고 전술에 대한 시각이 없느니 하는건 너무 결과론적인 발상임. 오히려 바다를 건너 상륙하는 적을 육군을 모아 단번에 치는건 매우 기본적인 전술에 가까움.
2. 왜 농성을 안했는가?
첫번째 이유로, 신립휘하 기마병은 정예인데, 보병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오합지졸이었다는 기록이 있음. 농성이나 산지전투를 벌이면 기마병이 전부 하마해서 싸워야 하는데, 이러면 기마병의 이점이 완전히 사라짐. 또, 신립은 대규모로 운용되는 조총부대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총부대의 기병 저지력을 과소평가한 감은 있음.
둘째로, 왜군은 전군이 오는게 아니라 고니시와 가토가 군을 나눠서 양쪽으로 진격해오는 상황이었음. 즉, 신립의 입장에선 농성을 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최대한 고니시를 빠르게 격파하고 가토를 추격해야 했기 때문에 야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음. 신립은 고니시와 가토가 경쟁관계라는걸 몰랐기 때문에, 고니시가 농성하는 신립을 묶고 가토가 한양을 치는 식으로 협동하는걸 경계했을 확률이 높음.
3. 왜군의 동향을 보고한 군관을 왜 처형했는가?
사기관리 차원일 확률이 높은데, 당시 조선 보병대는 오합지졸이라, 왜군이 이미 우회해서 포위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싸우기도 전에 와해될 위험이 있었음. 만약 조선군이 고려말기 군벌들의 군대처럼 장군이 직접 육성해서 훈련하는 방식이면 이런 소문만으로 와해되지 않지만, 조선은 전쟁나면 근처 농부들을 끌어모은뒤 장군만 지휘관으로 임명하는 방식이라, 훈련도와 사기가 매우 낮고 장군의 리더쉽에 극히 의존하는 스타일이었음. 결국, 왜군이 우회하는걸 알면서도 이 소문이 일반 병졸들에게 퍼지는걸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수 없이 처형했을 확률이 높음. 실제 역사에서도 전령을 사기관리 차원에서 처형하는 예는 종종 있었음.
4. 왜 기마병이 정면으로 돌격했는가?
기본은 보병으로 교전을 벌인뒤에 기병으로 허를 찌르는게 정석임. 문제는 조선의 보병대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리다보니, 보병대를 먼저 보냈다간 붙기도 전에 개박살날 확률이 높았음. 결국, 무리해서 기병으로 돌격을 해서 적진을 흔든 뒤에 보병을 붙이는 방식으로 전술을 짰음. 이 전술 자체는 기병이 정예이고 보병이 허접할때 쓰는정석적인 전술이라 별 문제가 없었지만, 땅이 너무 물렀고 조총의 저지력이 생각보다 컸으며 왜군의 대응전술이 상당히 세련된 수준이라 질 수 밖에 없었음. 쉽게말해 신립이 못싸웠다기보단 당시 포진도만 봐도 왜군이 굉장히 잘 싸운거임.
적 전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기병대로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은게 제일 큰 실책
치킨값 비교인줄 알았는데 당황스럽네
나도 치킨 생각함ㅋㅋㅋㅋㅋㅋㅋ
VS글 강등.
예전부터 생각한건데 임진왜란에 대해
엄청 자세하게 글 올려주는것 같아 좋다
반지의 제왕 글도 재밋지만 우리나라 역사는 별 관심 없어 하는것같던데
글을 잘써줘서 그런가 요즘엔 우리나라 역사도 베글 잘가서좋은 ㅎㅎ
반지의 제왕은 베스트좀 그만 올라왓으면
반지의제왕 쓰는사람도 유게이들 보라고 열심히 직접 쓰는거더만 보기싫으면 니가 안보면 됨 난 재밌게 보고있음
나도 그냥 내가 원하는 바를 적었을 뿐임
뭐 올리지말라고 윽박지르기를 했나
걍 전부 보는 베스트를 마이너한 컨텐츠가 너무 점령하는건 좋지않다 생각함
서브컬처 게시판이 아니라 유머게시판이니까
이 전투에서 무너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조금만 더 버티는 정도까지만이라도 전선유지만 가능했어도.
이후의 일방적인 진격은 막을 수 있었는데 가장 안타까운 대목.
당시 조선 전술상 상비군 비중 보다 예비군(?)비중이 더 높아서.
제대로 된 전투 전술 발동엔 어느 정도 쿨타임을 필요로 했는데 그정도 시간만 벌었어도
신립이 '부하들을 믿지 못했다.'라는 오명을 쓰진 않았을 듯.
최근 시리즈중에 제일 재밋다 정독하게되네
조선의 군은 약했군요.
약했다기보다는 저건 판단미스에 가까워서
1차적인 판단미스는 전쟁 낌새를 눈치챘으면 제대로 준비를 해야지 혼란을 이유로 전쟁준비를 하지 않은 왕과 조정탓이죠. 백성들 놔두고 임금은 튀고 궁궐은 불타고 어째서 조선이 안망했나 대단할 따름입니다.
조선군이 약해서 패배한 거에요.
이열 ^,^
중간세계빌런도 좋지만 님글도 좋네여 자주올려줘요
적 전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기병대로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은게 제일 큰 실책
니탕개의 난 때엔 그게 먹혔으니깐...당시 일본과 여진족의 차이를 몰랐던 게 컸지
이런걸 보면 정보란게 진짜 중요한거 같음
무슨일이 되었던 경험이라는건 결국 양날의검이 되는거같아요
지금 우리야 양쪽 상황을 아니까 왜그랬을까 해도
그 당시에는 상대가 어떠고 병력이 얼마고 알지도 못했을거고...
결국은 대등한 자리에서 조심히 접근하자고 신립을 테클걸 사람이 없었던게 제일 컸구만
부연설명
1. 수군폐지를 왜 요청했는가?
수군은 건조와 유지에 막대한 자금이 들고, 설령 수군이 멀쩡해도 수군의 근거지인 항구가 점령되면 그대로 와해됨. 이 때문에 수군폐지 주장이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느니 하는건 비약에 가깝고, 실제로도 이치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면 전라도가 넘어가서 이순신도 활약 못했을 가능성이 큼. 이치전투의 승리와 이순신의 활약으로 수군이 하드캐리하긴 했는데, 수군폐지 요청가지고 전술에 대한 시각이 없느니 하는건 너무 결과론적인 발상임. 오히려 바다를 건너 상륙하는 적을 육군을 모아 단번에 치는건 매우 기본적인 전술에 가까움.
2. 왜 농성을 안했는가?
첫번째 이유로, 신립휘하 기마병은 정예인데, 보병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오합지졸이었다는 기록이 있음. 농성이나 산지전투를 벌이면 기마병이 전부 하마해서 싸워야 하는데, 이러면 기마병의 이점이 완전히 사라짐. 또, 신립은 대규모로 운용되는 조총부대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총부대의 기병 저지력을 과소평가한 감은 있음.
둘째로, 왜군은 전군이 오는게 아니라 고니시와 가토가 군을 나눠서 양쪽으로 진격해오는 상황이었음. 즉, 신립의 입장에선 농성을 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최대한 고니시를 빠르게 격파하고 가토를 추격해야 했기 때문에 야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음. 신립은 고니시와 가토가 경쟁관계라는걸 몰랐기 때문에, 고니시가 농성하는 신립을 묶고 가토가 한양을 치는 식으로 협동하는걸 경계했을 확률이 높음.
3. 왜군의 동향을 보고한 군관을 왜 처형했는가?
사기관리 차원일 확률이 높은데, 당시 조선 보병대는 오합지졸이라, 왜군이 이미 우회해서 포위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싸우기도 전에 와해될 위험이 있었음. 만약 조선군이 고려말기 군벌들의 군대처럼 장군이 직접 육성해서 훈련하는 방식이면 이런 소문만으로 와해되지 않지만, 조선은 전쟁나면 근처 농부들을 끌어모은뒤 장군만 지휘관으로 임명하는 방식이라, 훈련도와 사기가 매우 낮고 장군의 리더쉽에 극히 의존하는 스타일이었음. 결국, 왜군이 우회하는걸 알면서도 이 소문이 일반 병졸들에게 퍼지는걸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수 없이 처형했을 확률이 높음. 실제 역사에서도 전령을 사기관리 차원에서 처형하는 예는 종종 있었음.
4. 왜 기마병이 정면으로 돌격했는가?
기본은 보병으로 교전을 벌인뒤에 기병으로 허를 찌르는게 정석임. 문제는 조선의 보병대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리다보니, 보병대를 먼저 보냈다간 붙기도 전에 개박살날 확률이 높았음. 결국, 무리해서 기병으로 돌격을 해서 적진을 흔든 뒤에 보병을 붙이는 방식으로 전술을 짰음. 이 전술 자체는 기병이 정예이고 보병이 허접할때 쓰는정석적인 전술이라 별 문제가 없었지만, 땅이 너무 물렀고 조총의 저지력이 생각보다 컸으며 왜군의 대응전술이 상당히 세련된 수준이라 질 수 밖에 없었음. 쉽게말해 신립이 못싸웠다기보단 당시 포진도만 봐도 왜군이 굉장히 잘 싸운거임.
덧붙이자면 조선같은 제승방략 체제는 왕이 장군에게 자신의 군대 지휘권을 위임하는 형식임.
이 때문에 장군이 지휘권을 얻었는데 적과 싸우질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해임사유가 됨. 아니 해임만 되면 운이 좋은거고, 재수없으면 모가지가 날아감.
만약 신립이 중앙군을 거느리고 야전을 안 벌이고 농성을 했으면, 다른 당파 대신들이 신립이 불충하고 게을러 적을 겁내 싸우질 않습니다 라고 상소하면 모가지 날아가는 거임. 이 때문에, 중앙군 지휘권 위임받고 군대를 거느리는 순간 무조건 싸워야 함. 이순신이 왜 모함받고 목이 날아갈뻔 했는지 생각해보면 답 나옴,
일본은 봉건제가 공고화 되어서 다이묘 휘하 병졸들이 그 다이묘 소속이지만, 조선은 제승방략 체제라 장군 휘하 병졸이 장군 소속이 아닌 왕의 소속임.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전투에서 졌으니 트롤러다 뭐다 하는건 지나치게 결과론적 발상임.
신립이 그냥 정신줄 잡고 문경지켯다면 선조의 빤스런도 없었고 다시 재정비한 조선군이 반격하는 시나리오로 갈수도 있음 신립이 말아먹은건 단순히 만육천명이 아니라 조선의 정예군이자 상비군 주력을 모두 끌어다 말아먹은거였음 문경의 방어력이야 가본 사람은 알겟지만 지세가 진짜 거지같이 험난해서 고니시가 뿅뿅발광을 해도 돌파를 못할 곳이었는데 신립은 이 모든걸 시원하게 말아먹음 심지어 네임드였기에 신립부대의 전멸은 조선군 전체 사기까지 바닥치게 만든건 덤. 말그대로 수퍼트롤러 딱 그정도였음. 여진족 나부랭이들 족치다가 진짜 정규군 만나니까 영혼까지 털린 케이스
나는 신립이 전략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데, 관건은 적을 막을 것인가, 적을 분쇄할 것인가에서 신립이 두 번째를 택한 것이 문제.
그러나 이 판단을 아주 무시할 수만도 없는 것이, 당시 패전 소식만 계속 들려왔기에 한 판의 큰 승리로 분위기를 반전할 필요가 있었고, 왕이나 조정의 신료들이 신립에게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어도 유형무형으로 압박을 가했을 가능성이 높음.
물론 북방 오랑캐와 싸워 패한 적이 없었던 자신을 지나치게 믿은 신립의 오만함도 한 몫을 했을 것이고.
문경 막는다고 왜국 북진 막는 건 아님. 거기다 위에 다른 유게이가 설명해 준 것처럼, 보병대 수준이 처참한 수준에 매일 도망병이 백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계속 문경에 죽 치고 있을 수 만도 없음.
신립이 전략이 잘못된 건 맞는데, 여건 고려 안 하고 무조건 ㅄ이라서 ㅄ판단 했다는 건 좀 아님.
신립 입장에서는 보병은 못 믿을만 하고, 총통위 폐지는 옛날 옛적이라 화포 잘 다루는 정예 병도 없는 상황에서 어중이 떠중이 모아 만든 보병대보다 기마대가 더 믿음직 했겠지. 실제 전투 주력이기도 했고.
신립은 걍 본인이 쓸 수 있는 책략 중에서 상책을 쓴 거지.
틀렸음. 문경은 완전 산골까지 그자체라 왜군이 옆에서 나타낫다라는
보고를 한 군관마저 처형할 정도로 두려움에떠는 농부들을 모아놓은 병력이라
문경같은곳에 병력을 포진해놓으면 안보이는틈에 죄다 도망갈 확율이 너무나 높았음.
그리고 본문에도있다시피 문경에서는 정예기병을 활용할수없음.
또하나 문경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길이지 유일한 길이 아님.
문경에서 방어구축하고잇으면 왜군은 돌아서가면 그만임.
신립은 대규모조총부대를 상대한 경험이 없고 병력이 너무나 오합지졸이라 그런것뿐
여진족이 오합지졸이라니 어처구니가없네요 이부분 때문에 비추드림.
불과 20여년후에 중국도 쳐발라버리는게 여진족임.
실제 조선의 가장큰 걱정거리가 여진족이었고
여진족애들이랑 대규모 기마전벌이면 중국이고 조선이고 답이없는 무서운애들이엇는데
기병으로 맞다이까서 발라버린것만봐도 신립의 기마병운용이 보통이 아님을 알수있음.
중국에서도 기마대 vs 기마대로 여진 몽골 이런애들이랑 싸워서 이긴사례가 거의없을 수준인데
괜히 명장 명장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게아님.
재밌다.. 앞으로도 이런 글 많이 부탁함
그 여진족 나부랭이가 수년 후 명나라를 찟어발기는대요....?
그와중에 가토 못본척 ㅋㅋㅋㅋㅌ
이 전투패배로 조선군은 한양 내주고 개성 내주고 평양 내주고 하염없이 북상하는 일본군에게 킬각잡힌 상황에서
조선수군 폐지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순신의 멱살캐리로 구사일생하게 된다.
무조건 이렇게 말 못함.. 두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번쨰 문제는 당시 조선기병대에 충격기병이 없고 궁기병 위주라는 점임. 이건 반란을 걱정해서 근접무기를 군제에서 빼버린 한 세조의 문제임.
궁기병은 적 진지 안으로 돌격하는 것이 아닌 근거리까지 활을 쏘며 근접하였다가 다시 멀어지는 방식의 가짜돌격을 사용하게 되는데 창보병대가 굳건히 버티고 궁보병대가 그 사이서 사격을 가하면 방법이 없음. 근접전은 하지 않기 떄문에 진흙의 영향이 극단적이라고 볼수 없음. 궁기병계는 기병을 농락하고 진형을 유연하게 바꾸는데에는 유용하지만, (사기가 낮은 농민병이 아닌 ) 어느정도 개기는 보병대는 충격기병(창기병)이 없이는 방법이 없음. 그렇다고 밀집보병을 녹일 대형화기를 가져온것도 아니고...
두번째 문제는 충주에서 결전을 안하고 수성전 혹은 산성전을 실시한다면 시간을 더 끌수는 있겠으나 일본군의 후속부대(최대 20만까지!)와 모조리 싸워야 해서 숫적으로 크게 불리해짐. 농성전을 할만큼 먹여살릴만한 군량이 성 안에 있었느냐도 문제. 인조가 남한산성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망한 원인도 군량이 성에 없었기 떄문임.
당시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부대를 소수로 나누어서 게릴라전을 통해 손실을 강요하는 것 뿐이였음. 근데 그러면 서울을 내줘야 하니까 신립이 할수 없었겠지..
스웜 전술은 안 되는거였나?
몽골인이면 되지
아니, 그냥 쏘고 튀고 쏘고 튀는 식으로.
결론적이지 않아도 신립은 트롤러지. 준비도 안되고 지형파악도 안되고 조언도 안들음. 불리하면 시간 벌기를 하면 되는데 고집 부려서 다 죽었다는 점에서 장군으로서도 미달.
그리고 신립이 조총부대를 과소평가했다고는 볼수 없음. 신립은 여진족 토벌에서 승자총통의 덕을 많이 봐서 그 위력은 충분히 알고 있었음.
임진왜란 초반은 진짜 암울했구만. 빨리 이순신의 하드캐리가 나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