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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북부대공 클리셰가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

판타지

특히 로판물에 단골로 등장하시는


이민족 혹은 몬스터 군단과 싸우는

다소 거칠고 냉혹하면서 야성미가 넘치는

수컷이지만

내 여자한테는 따뜻한 남자.


북부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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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 북부대공으로 이미지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물들을 보면

대충 어떤 이미지인지 알 수 있다.




이런 북부대공 클리셰를 까는 사람도 많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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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북부대공 클리셰가 매우 익숙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이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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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야 말로


북부대공 클리셰를 고대로 빼다박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



국사에서 시기를 분류할때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요런식으로 분류한다고 치면


고려는 대략 중세로 분류하는데

이성계가 한반도 동북면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공민왕~우왕 때로, 이때는 고려말이었고, 중세였음.


일단 시기적으로도 일치함.

판타지는 대부분 중세 배경이거든.

(물론 문명수준으로 보면 근세 후기에 가깝지만)



두번째로, 판타지의 북부대공은 북방의 전초기지에서 근무하면서

몬스터나 이민족과 싸우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데


이성계의 젊은 시절은 동북면에서 여진족과 홍건적을 잡는 일로 점철되었음.


이 이성계의 변경백 커리어의 최고 정점은


바로 황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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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로 개발살난 왜구들이 내륙으로 도주하면서 벌어진 일로


규모가 너무 커서 고려 조정에서는 지원군도 제대로 못보내고

니들이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공문 보낼 정도의 대사건이었고


이성계는 이 황산대첩에서 왜구들을 때려잡고 승리함으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됨.

(이성계의 찬양만 적혀있는 실록에서 이성계가 전쟁 중에 죽을 뻔했다고 쓰여져 있는 몇 안 되는 기록이 여기서 나옴.)


즉, 지방의 군권을 쥔 변경백이 큰 공을 세워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클리셰도 이성계가 먼저임.




그리고

이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여진족과 홍건적 때려잡고 사는 동안


정체불명의 태평성대는 아니지만

연회는 무지하게 자주 함.

(우왕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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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최영이 고려에서 가장 막장으로 살았던 왕인

충혜왕과 충숙왕도 너처럼 살지는 않았다고 면전에서 까버림.





그리고 로판식 내 여자한테만은 따뜻한 북부대공?

그것도 이성계가 원조다.


이성계에게는 부인이 두명이 있었다.

향처 한씨(신의왕후)와 경처 강씨(신덕왕후).


향처 한씨는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 혼인하여

아들 6명과 딸 2명을 낳은 아내였고,


경처 강씨는 이성계가 중앙으로 진출하기 전에 혼인한 중앙 명문가의 딸이었다.

(이성계보다 21살 연하로 언제 혼인했는지는 기록이 없음.)


특이하게도 둘 중 누구 하나가 첩이 아니라 둘다 정처였다.



이중 경처 강씨(신덕왕후)가 로판식 로맨스 대상이었는데

이성계는 이 강씨를 매우 사랑했다.


오죽하면


이성계는 장성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 5명을 제껴버리고(6남 이방연은 요절함)

8남중에 막내인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여러가지 합리적인 해설을 내놓았지만


신덕왕후 소생 중에서 세자를 세우겠다는 이성계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고,

그래서 둘 중에 그나마 나은 이방석이 세자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유는 나중에 붙은 것이고,

이성계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겠다고

땡깡을 먼저 부린 거다.



이것도 웹소식 클리셰에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정략 결혼으로 결혼한 부인의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게 아니라

진짜 사랑하는 여자와 낳은 자식(사생아, 서자)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클리셰....



그리고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정말로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


보통 왕과 왕비가 죽으면 능을 조성할 때 사대문 밖에 한다.


근데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죽자

정릉을 경복궁 바로 옆에 세워버린다.


그리고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경복궁 바로 옆에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인 흥천사를 지어버린다.






결론.

우리에게 북부대공이 친숙한 이유는

이성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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