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개선식'은 사실 제국시절에는 별로 흔치 않은 행사였다.
일단 기본적으로 신규영토를 획득해야 개선식이 가능하고,
제정시기에는 영토확장이 제한적이였으니 개선식도 많지 않았다는 언듯 보기에는 그럴듯한 설명이 있지만,
공화정 시기에는 700년 동안 3~4년에 한번씩 개선식이 벌어지고는 했고 그때마다 거대한 영토획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반란진압 같은 군공도 규모는 조금 작아지지만 개선식을 수여받고는 했기 때문.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로마 개선식이 가진 정치적/종교적 상징성에 있었다.
개선식은 공화정기 로마에서 새로운 거물 정치인의 탄생을 알리는 데뷔무대이자 국가가 공인한 선거유세였으며,
이를 통해 군사적 업적을 쌓은 장군들이 그 업적을 정치적 자원으로 전환하며 성공적으로 민간 정치인이 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기본적으로 로마세계에서 그 어떠한 군사행위나 군인도 로마시에서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로마시는 군인에게 있어 법률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규정되었다.
(임기가 다한 집정관이나 법무관, 총독들이 자발적으로 군적을 내려놓고 로마시에 돌아와서 선거에 출마한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
'개선식'은 이러한 신성불가침한 영역인 로마에
1. 군대의 추대와 원로원과 민회의 승인을 모두 받아,
2. 합법적으로 군인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로마시내에 돌아와서,
3. 유권자들 절대다수에게 자신의 군사적 업적을 각인시켜주어 엄청난 인지도를 쌓아주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선거에서의 승리가 되도록 보장해주는 확고한 보증수표와도 같은 행사였다.
그리고 개선장군의 업적이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공인하기 위해,
개선식 당일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왕의 상징인 보라색 의복을 입고, 로마의 주신 주피터(제우스)의 붉은색 얼굴화장을 허락받았다.
평소라면 공화정에 대한 반역이자 신성모독으로 간주될 의복을 갖춤으로서,
개선장군이 그날만큼은 로마세계에서 세속적/종교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서있다는 상징적 제스쳐였던 셈.
이렇게 엄청난 상징성을 지닌 행사이니 만큼, 개선장군 출신 정치인들은 보통 그 세대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인이 되었고,
같은 지위에 선출되더라도 개선식을 거친자가 항상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개선장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 개선식에서 개선장군 뒤를 따르는 가족들과 측근들도 다음 선거에서 당선은 보증수표나 다름 없었으며,
이를 노리고 개선장군을 따라서 개선식에 참여가 가능한 측근들은 개선식 행진 도중에 선거유세를 매우 적극적으로 할 정도.
다르게 말하자면 로마제국의 전통에서 개선식은 단순히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가 아니라,
군사적 업적을 세운자가 단 하루 로마세계에서 최고의 정치적/종교적 상징이 되어 군인으로서 로마시 경계를 넘는,
평시라면 신성모독적인 행위를 허락받는 일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황제들에겐 이러한 인물이 생기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부담이 된다.
왜냐하면 로마황제는 기본적으로 신격화된 숭배의 대상이였으며,
더 나아가 황제 직위 자체가 막대한 숫자의 사병을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공화정부 하에서 특별한 지위와 권한을 허락받은 시민이였다.
개선장군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로마황제의 권한을 정치적/종교적으로 위협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뜻.
애초에 로마황제이자 서방세계 황제의 롤모델과 같은 카이사르부터가 이러한 개선식의 정치적/종교적 상징성을 잘 알고있었고,
무려 5번씩이나 개선식을 수여받고 개선식이 끝난 뒤에도 계속 개선장군의 의복을 입고다니고는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개선식과 개선장군은 필연적으로 로마황제라는 지위와 너무나도 겹치는게 많았던 것.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들은 개선식을 자기자신에게 수여하거나,
아니면 후계자의 정치적 데뷔무대로 활용하였지만,
그런 용도 외에는 개선식은 점점 기피의 대상이 되면서 정치적 요식행위화 되어 의미를 잃어갔다.
개선식이란 제도는 태생부터가 황제보다도 유서깊은 공화정부가 개인에게 내리는 최고의 영예였던 만큼,
공화정의 법적체제 하에서 탈법적으로 권력을 쌓은 개인이 계속 유지하기는 부담스러웠던 것.
한줄요약 : 라이벌 만들기 싫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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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39
한줄요약 : 라이벌 만들기 싫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