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이런 식으로 퍼진 이순신 장군 난봉꾼 섹1스킹이라는
쉬다 못해 썩어서 먼지가 된 이 썰의 근원은 이러함
https://www.joongdo.co.kr/web/view.php?key=20110427000002326
시작은 연세대에서 만든 1977년 난중일기 영문판이 나오면서 시작 되었는데
당시 난중일기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 숙 宿 혹은 함께할 공 共
즉 그냥 합숙했거나 같이 있었다는 부분을 ㅅㅅ를 했다는 식으로 완전히 오역하는 심각한 실수를 범함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이 기생과 놀았다며 기생에게 회포를 풀었다는 썰은
실제론 사람들이 와서 놀기 위해 그냥 기생을 불러 즐겁게 놀았다는 부분이고
지인의 딸인 최귀지를 ㅁㅁ은 썰은 그냥 지인과 딸과 같이 밤에 이야기한 부분임
그중 하이라이트인 이순신 장군이 여러번 맛을 보았다는
계집종 여진 女眞의 경우엔 아예 어떠한 자료에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난중일기에 이순신 장군이 여진 余陣이라는 것을 여러번 썼는데
여진의 정체는 확실한 것이 없으나 암호 혹은 진영 陣營을 쓴 것으로 보는 중임
그런데 '소설' 에서 뇌피셜로 완전히 창작한
이순신 장군이 덮친 멘탈 ㅅㅅ케어 계집종 여진이라는 케릭터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 두 치명적 오류들이 확산되면서 결국 이순신 장군 ㅅㅅ킹 난봉꾼 썰의 시초가됨
이순신 장군의 비참한 순간을 관노의 집에서 밤새 ㅅㅅ라이프로
크게 오역된 대표적 구절을 마지막으로 끝내겠음
1597년 정유년 4월 21일
이 때는 파직을 당해 금부에 투옥되어 강력한 취조와 고문을 받았고 80세 노모가 직접 한양에 올라오다 돌아가셨으며
겨우 풀려난 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실 정도로 매우 몰린 상태였는데
지나가는 길에 관노의 집에 자기 위해 宿 들어와 홀로 앉아 비통해 하신 날임
그리고 4개월 후 원균이 후임으로 내정된 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해군을 전부 꼬라박아 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