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 특기생 같은 게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사실 스포츠특기생들과 마주치기도 힘들뿐더러, 스스로 자신이 특기생이라고 말하는 학생도 없었다. 보통은 티를 내지 않는 편인데, 한 여학생은 특기생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금방 알게 되었었다.
예쁜 여학생들은 사실상 연예인과 같은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연예인들처럼 사생활을 침범당하고 유언비어에 시달리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처럼 미모에도 대가가 따르는 편이다. 아름다운 꽃이 먼저 꺾이고 예쁜 모피의 동물이 먼저 멸종당한다.
그런 여자애가 있었다.
작년엔가 아이돌그룹 트와이스의 미나라는 일본인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라 기억을 더듬었었는데, 오래전 기억이라 미화되었을 수 있겠지만, 분명히 그 여자애와 닮았었다. 그런 얼굴을 가진 여자애가 남자애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그 여자애는 아이돌처럼 자주 웃지 않았다. 아니, 웃는 모습은 기억나질 않는다.
대체로 싸늘한 눈빛이었다. 눈도 커서 멀리서도 그 눈빛을 보는 건 매우 쉬웠다. 용맹한 몇몇 남자애들이 접근을 시도했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었다. 말하는 걸 들어본 애들도 적어서, 외국인이라는 소문도 돌았고 말을 잘 못할 것이라는 소문은 애교였다. 목소리가 이상할 것이라는 추측에서부터 벙어리일지도 모른다는 헛소리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헛소리들 쪽이 흥미로운 편이었는데, 그 여자애의 미모를 시기한 마녀가 혀를 뽑아 버렸다는 둥, 인어공주가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둥(몇몇 동화에서 인어공주는 두 발을 얻는 대신 목소리를 잃고 인간의 수명을 갖게 됨), 선녀들은 인간들과 말을 섞을 수 없다는 전통적인 규율에 입각한 헛소문들이 있었다.
헛소리들은 헛소리답게, 마녀가 미모를 시기했다면 혀 대신 다른 걸 뽑았을 것이고, 인어공주는 거품이 되는 동심파괴엔딩이 어울리며, 선녀라면 옷을 훔칠 수 있게 학교에 야외욕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들로 논파되었다.
조별과제를 피할 수 없는 학과의 특성 때문에, 그 여자애가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 했었다. 결국엔 그 여자애도 조별과제를 하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 여자애와 함께 조별과제를 했던 남학생들이 평범한 여자애라는 소릴 해서 비난받아야 했었다. 게다가 나중엔 그 여자애가 직접 발표도 했었는데, 정말 평범한 목소리라서 모두가 놀라워했었다.
모두가 그 여자애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에는, 그 여자애가 사이보그라는 소문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기 시작했었다.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구현하는 기술은 아직 무리라는 의견과 함께 성행위가 가능하겠냐는 논쟁에는, 그게 가장 쉬운 기술이 아니겠냐는 복수전공 공학도의 분석이 큰 지지를 받았다.
그 여자애는 단 한 번의 엠티는커녕, 그 어떤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친구도 없었고, 다른 여자애들은 그 여자애를 없는 사람 취급했었다. 항상 택시를 이용했기에 미행도 시도하기 어려웠다.(당시 우리 학교 근처에서 서울택시를 미행하려면 ‘제이슨 본’이 필요함) 온갖 추측들이 무성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상당히 잘 사는 집안의 딸이라는 것이었다.(사이보그도 성별을 가질 수 있냐는 논란이 있긴 했지만, 학과 사무실에 주민등록번호가 ‘2’로 시작되었음)
이런 이야기의 끝에는 그 여자애와의 우연하고도 놀라우며 감동적인 인연이 기록되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주인공에 몇 배수의 조연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주인공은 아니었다. 다행히 다른 주인공을 볼 수 없었기에, 우리가 모두 조연이라는 사실은 만족스러웠다.
단지.......
그때도 봄을 알리던 벚꽃이나 진달래꽃들은 모두 지고 철쭉이 피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따가워진 햇살에 여학생들의 옷자락이 가벼워지고 있었고, 그 여자애도 치마를 입고 등교한 날이었다.
그 여자애가 듣는 강의가 끝나는 시간에 몇몇 한가한 남학생들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난 우연히 그 곳을 지나치다 우연히 아는 녀석을 만났고 우연히 그 시간에 함께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오고, 그 여자애는 조금 늦게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혼자 나오는 그 여자애에게 또 한명의 예견된 실패자가 말을 걸었다가, 시도를 했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하고도 멍청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었다.
강의동에서 사물함이 있는 건물로 향하는 길목을 걷던 그 여자애가, 들고 있던 노트와 몇 장의 프린트 물과 펜을 떨어뜨렸다.
사실, 그 여자애가 비스듬하게 들고 있던 책과 함께 들려있던 노트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떨어뜨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사이보그도 그런 실수를 할 것인지 의심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 여자애의 팔과 팔꿈치 사이에 걸쳐있던 노트가 조금 더 비스듬히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놓치지는 않았다. 이미 발목에 힘을 주며 종아리의 근육을 풀어주고 허벅지를 긴장시켰었다.
박차고 뛰쳐나가기 시작했을 때, 함께 대화를 나누던 친구 놈도 달리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이 녀석의 주력을 잘 알고 있었다. 스타트는 조금 늦었을지 몰라도, 금방 나를 따라잡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다행스러웠던 건, 녀석이 간지럼을 잘 타는 것도 알고 있었다.
녀석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겨드랑이 바로 아래까지 긁어줬다. 녀석이 순식간에 온몸을 비트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었다. 뒤늦게 출발하려는 다른 남자애들도 있었지만, 이미 전력을 다해 달리는 내 모습에 포기해줬었다. 다행히 남자애들 서녀명이 한 여자애에게 동시에 달려가는 꼴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떨어진 노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여자애가 노트를 주우려 허리를 숙이기도 전이었다. 낚아채듯 노트를 줍고 프린트 물들과 펜도 주워냈다.(겨드랑이를 습격당한 친구의 회상에 의하면, 전성기 이종범이 루를 훔치는 모습은 슬로우비디오로 느껴질 정도였었단다.)
난 만족스럽게 그 여자애에게 노트와 함께 주운 것들을 내밀었다. 그 여자애는 그런 내게 전혀 당황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은데........”
“뭐해요?”(수업 끝나고 뭐해요? 학교 끝나면 뭐해요? 집에 가면 뭐해요? 매일 혼자 뭐해요? 이제 뭘 할 거예요? 등등의 질문들 중에 급하게 하나를 꺼낸다는 게 ‘뭐해요?’ 라는 말만 하게 되었다.)
“..........”
싸늘한 눈빛이었다. 어쩐지 나를 보는 게 아닌, 나를 관통해서 뒤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재빨리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입안에서 혀에 쥐가 나버렸다. 괜히 심술이 나고 열이 받아서 인상을 찌푸렸던 것 같다.
그 여자애는 살짝 고개를 꾸벅여 감사를 표하고는 갈 길을 계속 갔다.
난........ 한동안 ‘뭐해요’라고 불리게 되었었다. 복수전공하는 공학도가 말하길, 20세기의 인공지능 기술로는 완성되지 않은 문장에 답변하긴 힘들 것이라 했다. 또한 인문대학생이 문장하나도 완성하지 못해서 밥이나 먹고 살겠냐는 현실적인 조언도 잊지 않았었다.
그 여학생 때문에 문학도의 꿈은 접었었다.
끝.
ㅋㅋㅋㅋㅋ
재밌네요
낄낄낄 자서전적 소설인가효?
“모해요?” ㅋㅋㅋ
뭐해요?
고놈참 // 다행이네요. ㅋㅋ
동글짜리몽땅 // 그런 거죠. 후훗.
못해솔로 // 크흠~ ㅋㅋ 놀고 있습니다.
기아눈팅팬 // 어허흠! 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다
잘 읽었습니다~!
결말이 아쉽다ㅜ
ㅎㅎㅎ 잼있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
그 싸늘한 눈빛의 여대생은
어쩌면 별에서 온 그녀일수도...
거짓말 같지만 저는 밥이나 한번 먹어요 라고 해야하는 걸 잡숴요라고 한적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뭐해요?
이걸 왜 추미애로 보고 들어왔지ㅡㅡ 빨리 대선 좀 끝났으면 좋겠네요ㅜㅠ
잘읽었네요 북풍님 글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