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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4.3폭동설에 대하여

제가 논쟁을 아주 싫어해서.감정소모가 많거든요.그래서 어지간한건참전을 잘 안하는데요
시기가 시기인지 4.3관련글들 그중 좌익폭동을 주장하시는분들이 계셔서
제주사람으로서 말씀드리고자합니다
(용어나 사건등은 포털백과를 참조하시면 좋을듯 합니다.긴글이라 부연설명하기가 그렇군요)
1.
4.3폭동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논지는
당시 남로당은 남한전역에서 경찰습격등의 폭동을 통해 5.10단독선거를 저지하려고 했다.제주에서 일어난 사건도 양상이 같고,따라서 남한 남로당 지도아래 벌어진 폭동이다
이것입니다.
오랜 기간 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을 규명한결과
3.1발포사건을 원인으로 해서 제주민들의 진상규명.책임자처벌 요구를 미군정이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등 우익청년단체를 앞세워 탄압으로 일관,
제주도민과의 감정이 악화된가운데 단독정부수립반대과정에서 남로당을 중심으로 무장봉기가 벌어지고 그 진압과정에서 군경과 무장대의 충돌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사건
이것이 4.3에 대한 진상보고서의 내용 혹은 올해부터 바뀐 교과서의 내용일 것입니다
암환자가 폐렴으로 심정지되어사망하면 그 원인은 암일까요?폐렴일까요?아니면 심장질환일까요?

제주 4.3은 모든일이 그렇듯 주요원인과 부차적원인이 있고 간접적원인과 직접적원인이 있습니다
어느하나의 양상만으로 나머질 전부 하위개념화해버리면
무장봉기일수도
무장항쟁일수도
민란일수도
폭동일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원인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접근하시면 폭동이란 표현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걸 인정하실거라 생각합니다.
우선 질문을 하나해보죠
전국에서 소위 폭동이 일어났다고하는데
왜 제주도만 인구의 1할이 학살당했을까요?
대구에서 시작된 1946년 10월항쟁은 전국으로 확산.700만명가까이 참가했지만 그 1할인 70만명은 커녕 경찰.시위대합쳐도 천명을 넘지 못했습니다ㅡ기억이 가물가물.숫자는 ㅠ ㅡ
광주민주화항쟁의 공식희생자는 200명 이내이고 오천명 희생자설 등 이 있지만 역시 인구의 1할은 아닙니다
(제가 10월항쟁이나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님은 이해하실거라 믿습니다 )
그럼
왜 제주에서만 그토록 잔인한 일이 벌어진걸까요?
무장대가 더 대단했나요?
아닙니다.그들의 무장은 고작 오십명 이내
그외에는 죽창같은거였죠
반면 미군은 2차대전의 승자이며 세계최강국입니다
남로당이 전병력을 제주에 보낸것도 아니고 소련이 최신무기를 준것도 아니고 일제가 바다에 버린총을 해녀들이 건져다가 손질한 구식 소총이 전부였죠
그럼 왜 이런비극이 제주에서 벌어진걸까요?
2.
제주도를 이해하려면 인조때 내린 출륙금지령을 이해해야합니다. 즉 200년간 제주사람은 육지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신화,제주어 ,고유의 잔치문화 같은 것이 보존되었고, 서로 혼인 등을 통해 궨당문화가 생겼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무조건 웃사람은 삼촌(삼촌)아랫사람은 조케(조카)입니다. 궨당은 친척이란 뜻으로 이것은 촌수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그만큼 한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좁은 지역사회가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과 확연히 다른 양상의 저항문화가 만들어집니다. 강제검,방성칠,이재수의 난 등 19세기를 전후해서 잇달아 벌어진 민란에는 제주사람중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다 참가합니다. 이웃의 문제는 내문제고 궨당의 문제이니까요.
3.1절에 왜 제주사람이 인구의 1할이 넘는 사람들이 제주시와 지역마을에서 집회에 참가했는지,총파업에 유래없이 민관이 합동해서 전부 참가했는지, 단독선거 반대에 왜 제주사람들이 대거 호응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이런 전통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주에는 해방된 그 순간에 단하나의 이념만이 존재했어요. 사회주의항일운동가들이 제주사회를 이끌어왔고 존경받았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냐면 우리나라 사회주의 재판 1호의 피고인인 김명식이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그가 조천출신입니다. 조천은 제주도 지도를 보시면 가장 북쪽에 있어서 육지에서 오는 관리들이 내리는 부두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부촌이 됩니다. 그런 부유한 사람들이 자식들을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고 김명식과 고순흠도 그랬죠. 둘은 절친이지만 김명식은 사회주의, 고순흠은 박열(영화로 유명한)과 동급의 활약을 펼친 아나키스트입니다.
두사람은 제주에서 유학오는 고향후배들에게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배워줬고, 그들은 이것이 외세에 오래 시달려온 제주의 저항이념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입니다. 아나키즘은 일제의 탄압에 금방 시들어버렸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제주의 모든 생존권운동을 지도하고 야학의 선생이었습니다. 당연히 마을에서 존경받고 이들의 제자가 학교선생이 되었다가 4.3의 희생양이 됩니다.
이들이 지도한 가장 유명한 항일운동이 해녀항쟁입니다만 이로인해 조직이 발각되어서 목포교도소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복역자와 형량을 보유한 사람들이 됩니다. 박헌영보다도 더 형량이 높았어요.
그들이 만든 조직이 제주공산당 야체이카였고, 해방후 조선공산당, 이후 남로당으로 넘어갑니다.
이들의 활약중 가장 놀라운 것은 자주운항운동인데요, 일제선박주들이 제주-오사카간 배삯으로 폭리를 취하니까 그냥 제주사람끼리 돈모아서 배를 사버린겁니다. 이런 만화같은 일을 성공해낸 사람이 김문준인데요, 그는 학교 교장선생이었다가 일제를 물리치려면 일본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노동운동을 합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존경하는 사회운동가입니다만 제주에서의 인기는 짐작할만할 것입니다.
이 배에...걸린 깃발이 적기이고, 제주 사람들은 적기가를 애국가보다 먼저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와서 애국가 불러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적기가를 불렀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상해임시정부를 거의 몰랐습니다. 일부 유학생이 가담했을 뿐이죠. 김구도 거의 모르고 이승만은 일본에 나라팔아먹은 사람이라고(실제로 그 비슷한 사유로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으니까)알고 있었어요. 제주 사람들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지도자는 사회주의자들뿐이었죠.
이런 곳에 육지인들이 와 보니, 순 빨갱이천국으로 보였겠죠? 빨갱이는 다 죽여도 된다는 냉전논리가 하필이면 3.1발포직후 발표됩니다. 그게 바로 트르먼 독트린입니다.
미군정은 남한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자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민족의 주권은 미군에 있고, 미군사령관이 최고 통치권자인데, 미군사령관은 미국의 군인으로 미국의 이익에 복무해야 합니다. 당연히 레드아일랜드 제주는 적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직접적 원인중 하나입니다.
2.
4.3폭동설이 주장하는 바에는 3.1발포사건이 사건의 시발점이자 원인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모순이 있습니다. 역으로 물어보면 됩니다. 그 사건이 없었어도 4월 3일에 무장봉기가 일어났을까요?
아마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로당이 지령했으니까요.
맞습니다. 남로당이 5.10선거 반대했죠. 하지만 김구도 김규식도 반대했습니다. 분단으로 가면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3차세계대전이 벌어질 것이다. 이것이 반대의 이유였어요. 제주도민도 그래서 전부 반대했습니다. 통일국가가 좋지 그럼 분단국가가 좋겠어요?
당연히 제주도 사람들은 기를 쓰고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무장봉기를 일으켰을거라고 추론할 수 없는 증거들은 차고 넘칩니다
일단 제주 사람들은 궨당사회에요. 서로 잘 알아서 싸움도 안일어납니다. 그런 말 들어보셨죠?제주에는 도둑,거지,대문이 없다고. 그런 곳이 제주입니다.
1946년 10월항쟁때에도 제주도에선 단 한건의 집회나 시위도 없었어요. 곳곳에서 보리공출 때문에 충돌하긴 했지만 그정도는 좌익폭동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죠. 경찰서를 습격한 것은 단한번도 없었죠. 최초의 경찰서 습격은 3.1발포사건이 일어난지 10개월후에 경찰로 항의하러 간 시위대가 경찰이 겁먹고 다 도망가버린걸 알고 화가 나서 돌멩이로 유리창 몇 개 깬 게 전부였습니다.
그럼 왜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났냐면
당연하겠지만 제주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이곳을 지배한 사람들의 탐욕때문이죠.
미군정은 제주도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에 저항하여 곳곳에서 좌익단체들이 만들어지고, 미군정과 육지출신 경찰들과 일제때 부역자들이 연루된 비리사건이 터지자 겁에 질려 기마경찰대를 만들고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바로 응원경찰을 불렀습니다.육지에서 말이죠.
미군은 일본에서는 국립경찰제도를 해체하고 공안위원회를 만들어서 민간인 산하에 민주경찰제도로 바꿨지만 한국은 통치의 효율을 위해 국립경찰제도를 그대로 뒀어요. 그러니까 조병옥의 전화한통이면 서울에서 제주사람 다 죽일수 있게 된 것이죠. 적어도 일제도 식민지시절 제주도는 제주도사가 경찰권을 행사하게 했습니다.
국립경찰제도는 미국에서도 용납이 안됩니다. 그 지역사정을 모르는 경찰은 필연코 문제를 일으키니까요.
하지만 응원경찰은 불과 몇 달전 10월항쟁에서 경찰이 죽어나가는 걸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제주도에 와서 보니 모든게 낯설고 말도 틀리고 옷도 틀리고 문화도 다릅니다. 그들이 결국 상황을 오판하고 발포를 합니다.
그런데 응원경찰의 힘으로 10월항쟁을 겨우 진압한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친일경찰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고문을 인정하고요. 따라서 3.1발포사건의 책임을 인정하면 전국의 치안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제때 단 101명으로도 충분했던 제주도에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수천명이 몰려와서 청년들을 다짜고짜 패고 잡아들이고 고문합니다.
4.3봉기가 벌어지자 제주사람들은 전부 무장대를 응원합니다. 경찰몰아내길 바란거죠. 그러면 다시 평화가 찾아올거라고 믿었어요.순진했죠. 그 대가가 3만명의 죽음입니다.
4.
남로당 지령설은 이미 거짓임이 판명되었습니다. 박헌영 비서출신 박갑동의 주장이 유일했는데, 박갑동은 그 증언이 국가정보기관에서 만든 조작이라고 밝혔습니다.
남로당과의 관계는 사후승인정도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김달삼이 박헌영품에 안겼다는 말에 대해서.
그때 남한에서 북으로 일종의 대의원선거(지하선거)를 통해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한 남한 사람은 1002명입니다. 김달삼도 그 중하나고 제주도 대의원자격이었습니다.
단독선거가 벌어진 후 단독정부인정이냐 북이 주장하는 통일정부인정이냐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선택하는 바람에 제주도에 피바람이 불어올 근거를 제공했으니 그가 짊어질 역사적 짐은 분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1002명의 대의원을 보낸 곳 중 왜 제주도만 초토화시켜야 했을까요?
김달삼이 박헌영의 지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 북에 가서 거들먹거리며 자기가 인민봉기를 성공시킨 유일한 사람이라고 과시해서 박수를 받았다고 해서 그게 북의 지령설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이상으로 긴글은 마치겠습니다.
이글은 주식글에 묻히겠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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