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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영화 [미안해요, 리키]를 보고..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리키들을 위해 (스포 포함)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를
조금은 늦게 VOD를 통해 보았습니다.
켄 로치 감독의 작품들은
다르덴 형제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보려고 마음 먹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죠.
가슴 깊은 곳을 짓누를 영화의 무게를 알기에.
그러나 일단 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들 삶의 현실과 비슷한 영화의 세계 속으로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메시지가 전하는 울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극장에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죄송해요, 감독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
훌륭한 영화의 의미와 여운을 훼손시키는
제목의 번역이 꽤 아쉽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1936년생의 노장, 켄 로치 감독에 대해서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리뷰에서 언급한 적 있죠.
블루칼라의 시인이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
평생을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영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묵묵히 조명해 온 거장입니다.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2016년,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두 번이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은퇴선언을 번복하고 3년 만에 발표한 작품인데
이런 번복은 그저 반갑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각본은 이번에도 켄 로치의 영원한 동반자,
폴 래버티에 의해 씌어졌습니다.
영화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마찬가지로
암전 상태에서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들려주며 시작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리키(크리스 히친).
건설회사에서 해고당한 후
해보지 않은 일이 없는 그는
실업수당을 거부할 만큼 자존심 강하고
성실하며 책임감 강한 가장입니다.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희망 하나로
개인사업자의 자격으로 택배회사에서 근무하며
하루 14시간, 주 6일을 일하려고 합니다.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는 방문 간호조무사로
남편 못지않게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며
천사보다 더 착한 마음씨를 가졌죠.
택배일을 시작할 리키가 밴을 지입할 수 있도록
자신의 차를 팔아 그 대금을 마련하고
스스로는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며
헌신적 희생을 감수하는 그녀에겐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두 자식이
그저 안타깝게 마음에 밟힐 뿐입니다.
방문하는 환자들의 식사는 살뜰히 챙기면서도
어린 딸의 식사는 전화로 챙길 수 밖에 없죠.
맞습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노동과 노동자는
이른바 플랫폼 노동과 플랫폼 노동자입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탄생한 이 노동은
스마트폰과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노동력이 거래되는 근로형태를 가리키죠.
배달대행업, 대리운전, 보험판매원, 학습지 교사,
정수기 코디 등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고용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것이고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이며
어엿한 서비스 제공자로서
고용계약이나 목표실적 없이
배송기준만 지키면 된다며 감언이설로 유혹하지만
배송 중 발생하는 모든 사고에 대해서도
개인 스스로 책임을 부담해야 합니다.
2초만 떨어져 있어도 경보음을 보내는
1,000 파운드짜리 스캐너는
소변을 보러 갈 틈도 허락하지 않죠.
휴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근무 중의 변수로 채우지 못한 업무에 대해선
자신의 비용으로 대체기사를 구해
벌충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개인사업자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포장됐지만
실상은 법률의 보호망에서 누락된,
자본과 시스템과 기계에게 착취된 노예로서
리키는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해 갑니다.
그리고 그와 비례해
가난하지만 따뜻하게 지켜지던 가정의 평화도
차츰 무너져 갑니다.
고등학생인 아들, 세브(리스 스톤)는
비행과 욕설을 일삼으며 부모에게 반항하죠.
가뜩이나 정신없는 리키와 애비에게
걱정과 고통을 배가시키는 그가 밉긴 하지만
사실 그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남들보다 일찍 깨달은 것일 뿐
가족에 대한 큰 사랑을 가진 아이입니다.
한없이 착하지만 여전히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11세 딸, 라이자(케이티 프록터)는
예전의 단란했던 가정을 그리워하며
소심해지고 위축됩니다.
그녀가 슬픔을 속으로 속으로 삼킬수록
가슴 속의 멍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영화의 후반부, 진실을 털어놓으며
끝내 울음을 쏟아내는 라이자를 지켜보며
눈물을 참을 수 있는 관객은 많지 않을 겁니다.
자아의 성취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할 노동이 오히려
자존감과 가족의 행복을 무너뜨리는 아이러니...
약간의 유머를 잊지 않으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가족의 변화를 담던 카메라는
이 가여운 가족에게
아주 잠깐의 행복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라이자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을 이용해
리키는 딸과 함께 일을 합니다.
나누지 못했던 대화도 나누고
함께 신나게 웃기도 하고
퇴근하는 길에 인도음식을 포장해
가족 전체가 모처럼 오붓한 만찬을 함께 하는
일련의 시퀀스...
그러나 우리는 이 아주 잠깐의 행복이
참담한 비극으로 이어질 것임을 알기에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그래피티를 위해 스프레이 캔을 훔친 아들 때문에
리키는 업무 도중에 벌점과 벌금을 감수하고
경찰서로 달려 갑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세브의 눈을 응시하며
경찰관은 가슴에서 우러난 진심을 말하죠.
이렇게 일을 팽개치고
굴욕을 감수하며 찾아온 가족을 위해서라도
올바르게 살아달라고.
경찰관의 그 진심이 켄 로치 감독의 진심임을,
방황하는 젊음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남기는 감독의 유언임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리키 역할을 맡은 크리스 히친을 포함해
데비 허니우드, 리스 스톤, 케이티 프록터 모두에게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죠.
물론,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지만.
크리스 히친은 배관공으로 20년을 일했고
데비 허니우드도 정리해고의 경험이 있답니다.
켄 로치 감독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오늘도 몇 번씩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르는
우리의 이웃들이 영화 속의 인물들임을,
더 나아가 우리와 우리의 가족들이
영화 속의 주인공임을 말하고 싶진 않았을까요.
영화의 엔딩...
일을 하다 강도를 당해 흠씬 두들겨 맞아
눈이 퉁퉁 붓고 갈비뼈가 부려졌음에도
방문을 하거나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모든 책임을 리키에게 전가시키는 회사.
남편을 대신해 분통을 터뜨리는 아내...
다음 날 아침,
새벽 6시에 눈을 뜬 리키는
우유 한 잔으로 허기를 때우고는
아내에게 편지를 씁니다.
여기에서 영화의 원제로 돌아가야 하니,
Sorry We Missed You는
택배 주문자가 집에 부재할 때 남기는
부재 중 배송 알림 문구입니다.
그 문구가 새겨진 종이에 리키가 글을 씁니다.
"화내지 마, 애비. 나 괜찮을 거야. 사랑해..."
그리고는 그 빌어먹을 밴에
천근만근 몸을 싣고는 운전대를 잡죠.
황급히 아버지의, 남편의 출근을 말리러
아들이, 아내가, 딸이 달려나와
제발 가지 말라고,
제발 예전의 아버지로 돌아와달라고 애원하지만
리키는 기어어 차를 돌려
일터로, 지옥으로 떠납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던 카메라는 리키 바로 옆에서
울음을 삼키며 넋이 나간 채 운전을 하는 그를
클로즈업으로 잡아내지만
카메라가 리키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습니다.
6개월 전의 리키보다 6개월 후의 리키가
더 행복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6개월 후의 리키가 지금의 리키보다
더 나아질 게 없으리란 예감은
지켜보는 이들을 무력하게 합니다.
당장 내일이나 모레,
내가 주문한 물건을 배송해 주는 기사님을 위해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해드려야겠다는 다짐도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미안해요, 리키]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또 다른 리키들을
단순히 위로하고 응원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우리의 리키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이 사회가 나서야 함을
간절하게 호소하는 영화입니다.
그들의 성실, 딱 그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그들의 책임감, 딱 그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그들의 사랑, 딱 그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그들의 존엄한 삶을 위해
우리 사회가 달라지고 움직여야 한다고...
한 인간과 그의 가족의 행복이
그의 최선을 다한 노력의 범위 밖에 있을 때,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해
국가는 존재해야 한다고...
댓글
  • 이성과논리 2020/02/15 07:02

    좋은 글 감사합니다.

    (Qu3E6e)

  • 혁명전야 2020/02/15 07:10

    이성과논리// 많은 분들의 우려와는 달리, 영화 드라마틱하고 상당히 흥미진진하답니다. 칸영화제에서기생충과 경쟁했던 작품인데 더 많은 분들이 보셨음좋겠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Qu3E6e)

  • Steveny 2020/02/15 07:47

    켄 로치 감독을 정말 존경하는 1인입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며 펑펑 울었었는데,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서도 그런 감정을 느꼈습니다. 무거운 분위기의 영화를 싫어하시는 분들은 보시지 마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께는 꼭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리뷰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Qu3E6e)

  • 혁명전야 2020/02/15 07:52

    Steveny// 저 역시 너무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님입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보단 조금 더 에너지가 넘치고 드라마적인 요소를 가미했기에 우울한 분위기의 영화에 대해 거부감있는 분들도 조금은 쉽게 접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영화가 끝난 후 여운에서 벗어나기 힘든 점이겠지만...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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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kay 2020/02/15 09:43

    개인적으로 작년에 본영화 중에서 다섯손가락에 드는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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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자 2020/02/15 22:52

    늦게나마 한달전쯤, 꽤 먼거리 극장에서 봤는데 매우 만족했습니다. 오히려 놓쳤으면 굉장히 후회할뻔했어요.
    여운과 감성이 꽤 오래 남더군요. 특히 엔딩의 그 강렬함은.. 작년 영화중에서 손꼽고 싶습니다. 리뷰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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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20/02/16 01:35

    C-kay// 매우 높게 평가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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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20/02/16 01:36

    라이자// 맞습니다. 엔딩은 정말 넘넘 훌륭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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