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부모님께서 사주신 PC였다.
그보다 더 전 PC는 아버지 회사에서 직원 하나가 나간 후 그 PC를 떼온 것이었다.
플래시 게임은 그럭저럭 돌아갔지만, 당연히 2010년대 게임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떼를 썼지만
부모님은 들어주지 않으셨다.
기어이 명절 용돈을 3년이나 모으고 나서 100만원과 함께
생일날 그 돈과 함께 PC를 사달라고,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가불기를 걸고 나서야 내 돈과 부모님 돈을 합쳐 200만원짜리 최신 삼성 PC를 구입했다.
사실은 조립형 PC를 사고 싶었다.
아무리 어려도 중딩 즈음이면 알 건 다 안다.
하지만 내가 늦둥이인 탓에, 부모님 연세가 꽤나 있으시고
그 탓인지 부모님은 굉장히 고지식하셔서, '100만원이 넘는 가전은 무조건 대기업에서 사야 한다' 고 못을 박으셨다.
그 탓에, 사실 그 200만원이면 훨씬 더 좋은 PC를 살 수도 있었으나 어쩔 수 없이 삼성 PC를 샀다.
어머니가 "그럼 사지 마, 돈 안 보태줘." 라며 홀로 삼성플라자를 나가셨을 때는 눈물을 훔치며 나도 혼자 집으로 돌아갔고, 결국 며칠 후 PC를 구입했다.
물론 내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슬픔과 화는 새 PC의 까리함에 묻혀 사라졌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은퇴를 하셨고, 어머니는 오전에만 소소한 일을 하신다. 두 분 모두 연세가 70이 되어가신다.
집값이 비싸고, 어차피 일하는 곳이 근처기에 여전히 집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와 여전히 매일같이 방 청소 문제, 빨래 문제, 바깥 음식 문제로 싸운다.
하지만 이제는 내 목소리가 더 크다.
어머니의 힘이 없으신 탓일까.
이제는 내가 돈을 보태기 때문에 따질 게 적어져서 그럴 수도
아니면 그저 어른이기에 선택권이 있어서 자신감에 그럴 수도
혹은 이제 어른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라 생각하실수도
혹은 이제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실수도.
며칠 전 PC를 구입했다.
컴퓨터를 잘 아는 지인에게 검수를 받아, 250만원 가량의 PC를 구입했다.
최신형이다. 전부 내 돈이기에 부모님의 도움도, 부모님의 허락도 필요 없으니 당연하게도 이전과는 달리 조립형이다.
어릴 때와는 달리 조립형 PC에 대기업 완제품 PC와 동급의 AS 기간이 따라온다.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PC를 설치하려고 했더니, 모니터 케이블이 구형이다.
케이블을 새로 바꿨다.
케이블 문제가 아니었다. 모니터 단자 자체가 문제였다. 좀 더 알아볼걸 그랬다.
여윳돈으로 모니터를 바꿨다.
바꾸는 김에 와이파이 기계도 더 좋은 걸로 바꿨다. 메인보드를 와이파이 지원형으로 요청했기에.
그리고 나서야 PC를 바꿨다.
이전 PC를 바라보았다.
낡았다. 참으로 낡았다.
물론 더 낡은 PC도 세상에는 많았지만, 내 눈에는 그랬다.
애지중지 다뤄오며 고딩 때 갑자기 서멀 구리스가 제대로 된게 아니면 렉이 심하단 말에 꽂혀서 고딩 2년 동안 서멀 구리스를 4번이나 갈아줬다.
별에 별 게임을 다 깔아봤다.
롤, 히오스, 오버워치, 스타, 와우, 도타, 문예부, 에이펙스, 데스티니, 로스트아크, 엘소드, 마인크래프트, 그리고 딸을 책임져준 야겜들.
내 어릴 적 그 자체였다.
사실 PC를 바꾸게 된 계기는, 더 이상 고사양 게임들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아서였다.
로딩에만 매번 30초가 소비되어 레이드를 같이 돌던 지인들이 반 장난, 반 진담으로 내 컴퓨터를 까내렸다.
한숨을 쉬며 먼지를 불어내고, 당근마켓에 팔아버렸다.
15만원.
200만원이 15만원이 됐지만, 세월은 그런 법이라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컴퓨터를 설치하겠답시고 어질러둔 방을 치웠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방에서 점점 부모님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는, 전부 내가 산 것들이었다.
왠지 모를 착잡함을 느꼈다.
PC를 켰다.
예전 컴퓨터로는 30초가 걸리던 로딩이 2초가 되기 전에 끝난다.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는, 겉옷을 벗고 매칭을 돌리려다
주머니에서 당근 48.6도가 준 반들반들한 5만원권 3장이 만져졌다.
왠지 모르게, 게임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은건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기분이 좋음에도 슬퍼졌다.
언젠가 내 방에서 부모님이 주신 모든게 사라지겠지.
이 집에서도 사라지겠지.
집에 남겨진 마지막 흔적을 신품으로 갈아치울 때, 나는 똑같이 착잡해할 수 있을까.
딸쳤냐
아끼면서 오래쓴물건 보내줄때는 뭔가 섭섭하지
부모님 영상이나 많이 찍어둬라.
딸쳤냐
아끼면서 오래쓴물건 보내줄때는 뭔가 섭섭하지
부모님 영상이나 많이 찍어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