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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딸, 괴문서) 골드 시티와 연기 도우미 트레이너



  출입문을 잠그는 소리가 울린다. 반향도 없이 사그라진 자리에는 재차 침묵이 찾아왔지만,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님은 말 없이 이쪽을 응시할 뿐이었다.


  “오늘도 할 거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고양이처럼 기웃기웃.

  장난기 가득한 그 동작이 조바심을 부추긴다.


  “위험하다고?”


  수업 직후의 교내는 유동인구가 많아, 제아무리 트레이너실이라도 안심할 수 없다. 연신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나와 반대로 담당 우마무스메인 골드 시티는 차분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뚫어져라 보내오는 눈길. 체육복 대신 걸친 맵시 있는 자켓 아래로 희뿌연 손이 솟아올랐다.


  “어.”


  건성으로 대답하며 톡톡 건드리는 손, 하지만 푸른색 눈동자는 네일이 아닌 이쪽을 향했다.


  “진짜로?”

  “그렇다니까. 얼른 이리로 와. 나 촬영 가야 해.”

  “바쁘다면 오늘은 건너뛰어도 되는 게······.”

  “두 번 말 안 한다? 빨리.”

  “···하아.”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자기고집이 강한 아이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과격할 줄은. 처음 만났을 무렵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근심거리다.


  “후훗, 그래야지.”


  마지못해 다가가자, 시큰둥하던 시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빼지 마. 처음부터 협조하면 좀 좋아? 당신이 밍기적거릴수록 시간만 지체 돼. 설마 담당을 지각시킬 셈은 아니겠지?”

  “알았어, 알았다고······.”


  건들건들 찌를듯이 턱을 치켜든다. 실컷 늘어놓은 잔소리도 성에 안 차는지 허리에 손까지 얹고는 기세등등이다. 지각이 염려될 정도라면 하루쯤은 빼먹어도 될 텐데, 말해봐야 억지를 부릴 게 뻔해 입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차분해진 교정에 저녁놀이 스며들고, 어슴푸레한 호박색 빛이 보석 진열장의 조명처럼 커튼 사이로 비쳤다. 짙어져가는 그림자와 반대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빛나는 한 쌍의 눈빛. 한 숨을 쉬며, 황금빛 머리카락을 스쳐 시티가 기대고 선 문에 손을 짚었다.

  나머지 손은 가볍게 허리에. 조심스레 끌어 안고, 품에 들어온 얼굴 위로 입술을 포갰다.


  “응······.”


  처음은 감촉을 맛보는 기나긴 키스. 호흡이 맞춰지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젖히고 각도를 조정해, 더욱더 깊숙히 서로의 숨결을 섞는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둘만의 공간을 희미하게 울려퍼지는 물소리만이 채워나갔다.


  “······푸하.”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티의 입술이 떨어졌다. 시간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먼저 물러나는 쪽은 항상 그녀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피부에 손을 대자, 어루만진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언제나 당당하게 치뜨던 눈은 촉촉히 젖은 채 일렁인다. 마치 이 이상의 단계를 요구하는 것처럼.


  “시간, 늦지 않았어?”


  이치에 맞는 질문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정말 성실하다니까.”


  이번에는 시티 쪽에서 긴 한숨을 내쉰다. 거리는 그대로였기에, 그 열기는 가슴팍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말실수를 한 걸까 조마조마했지만 뒷말은 없었고, 시티는 내 가슴을 살짝 밀어내며 매무새를 정돈했다. 


  책망인지 격려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한창 바쁜 가운데 트레이너실로 찾아온 이유도, 방금 전까지 그런 행위를 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터로 향하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도 수고했어. 내일 보자, 트레이너.”

  “······그래, 조심해서 가.”


  들어올 때보다 아주 조금 밝아진 그 미소 때문에, 나는 오늘도 이유를 묻지 못 하고 토끼를 놓아준다.


  —⏰—


  언제부터 이런 관계가 되었느냐 묻는다면, 계기는 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사다난했던 트윙클 시리즈가 끝난 이듬해 봄, 바야흐로 골드 시티의 주가가 최고조를 달리고 있던 무렵이다.


  고생 끝에 쟁취했던 클래식 노선에서의 영예로운 커리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쌓인 드라마가 예상보다 커다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비주얼로는 일찌감치 인정받았어도 레이스와 모델 양쪽 다 ‘신참’ 딱지를 떼지 못했던 풋내기. 그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절실했던 ‘개성’을 거머쥔 것이다.


  ‘서사’에는 존재감을 만드는 힘이 있다. 쌓아올린 이야기는 한결 깊은 매력을 부여한다는 스포츠 쇼맨십의 생태는 단연 연예계에서도 통하는 논리다. 항상 앞을 향해 정진하는 어른스러움과 그 나이대 소녀의 친숙함이 공존하는 존재, 팬들에게 시티란 그런 우마무스메였다.


  빼곡하게 잡힌 훈련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한 번의 펑크도 없이 촬영에 임했던 시티. 

  성장통은 길었지만 감내할 수 있었고, 멋들어지게 시련을 통과했다. 대체할 수 없는 무기를 손에 넣은 시티를 향해, 양쪽 업계에서 러브콜이 쏟아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실함은 나와 만나기 전부터 갖고 있던 본성이었지만, 아마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테지.

  시티는 강하니까.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어  전부 손에 쥐어버린,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욕심쟁이인 우마무스메니까.


  그렇기에 트레이너인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욕심많은 아가씨가 고집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지하자고 다짐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결심이 원인이었을 지도.

  그날 아침, 굳은 얼굴로 트레이너실을 찾아온 시티를 본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녀에게 끌려다니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상담할 게 있어.”


  상담이라니? 시티가 내게? 골똘히 생각해도 의문부호만 떠오를 따름이었다.

 

  트윙클 시리즈가 끝난 뒤로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니까.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충분히 상의하여 정했고, 출전 레이스 명단도 전부 전달한 상태다. 스케줄 조정이라면 매니저님 쪽에서 연락이 왔을 터. 어느 쪽이든 교문이 열리기 무섭게 찾아올만큼 급한 일은 못 되었다. 


  혹시 컨디션이 나빠졌나 살펴봐도 평소 그대로인데. 뛰어온 탓에 숨이 찬 건지, 묘하게 얼굴이 붉어져 있기는 했지만.


  “있잖아. 나 이번에 새로운 일을 맡게 됐어. 패션 잡지의 컨셉 촬영인데.”

  “어, 진짜? 축하해, 시티! 요즘 진짜 성황이네. 지난 주에도 세 건이나 들어왔었잖아!”


  심지어 세 건 모두 단독지명이었다. 본인 명의의 일감은 모델을 향한 신뢰지표다. 동시에 트윙클 시리즈를 통해 얻어낸 대중의 관심이 레이스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네. 매니저님은 나한테 아무 말씀 안 하셨는데?”

  “이번만 대신 전달하려고. 예정일이 연말이라 많이 남았기도 하고, 언니는 항상 바쁘거든.”

  “하긴. 거물급이 된 시티의 뒷바라지를 하려면 그럴 만도 하지.”

  “놀리는 거야? 그렇게 치면 트레이너도 마찬가지면서.”

  “하하하, 미안미안.”


  매서운 눈초리에도 새어나오는 웃음은 멈출 수 없었다. 주니어급이 시작되기 전, 타고난 매력 만으로도 업계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우마무스메가 시티였다. 직접 지명이라면 필시 작은 회사는 아니겠지만, 웬만한 기업의 제의조차 연말까지 밀려버릴 만큼 모델로서의 골드 시티는 ‘거물’이 된 것이다.


  축하하지 않고 배길쏘냐. 포기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담당의 주먹에 아슬아슬하게 힘이 들어갈 때까지 웃고 난 다음에야, 나는 겨우 최초의 화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나저나 상담이란 건 뭐야?”

  “······실은 이 일에 대해서 인데.”

  “촬영 일 말이야? 별일이네. 시티가 내게 현장 이야기를 해준 적은 거의 없지 않아?”

  “나도 동감해. 스스로도 꽤나 망설였고. ······그치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트레이너 밖에 없었어.”

  “나라도 괜찮다면야, 당연히 협력해야지!”


  오히려 팍팍 의지해줬음 싶다. 이 아이는 다소 솔직하지 못한 면이 있어 불안하니까. 혼자서만 끙끙 앓지 말고 도움을 구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더욱이 그 대상이 나였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업계 사람도 아닌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불안하긴 하지만······.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으니 전문지식이 필요한 상담은 아닐 테지. 

  작업기간 동안의 스케줄 조정이려나? 연말은 아직 머니까 레이스라면 문제없다. 아니면 트레센 학원과의 공식적인 촬영협조? 있을 법 하네. 좌우지간 정확한 내용 확인이 급선무겠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청사진을 그리던 그때의 나는, 큰 고민 없이 이렇게 되물었다.


  “그래서, 어떤 촬영이야?” 


  그러나 시티는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째서인지 뒷짐을 지며 눈을 피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참을 머뭇거리던 시티는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 건 아니고, 연인 컨셉인데······. 상대 배우랑 간단한 스킨십이 있어. 손을 잡는다던가, 가볍게 껴안는 뭐 그런 거. ······문제는 키스지만.”

  “······미안, 뭐라고?”

  “뭘 딴청 피우고 그래? 정확히 들었으면서. 키스라고, 키스. 입술끼리 부딪치는.”

  “······있잖아 시티, 이번에 들어왔다는 일, 어디 회사인지 확인해봐도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쪽 같은데, 내가 직접 연락해 봐야······.”

  “아 진짜! 무슨 엉큼한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버럭 소리지르기 무섭게 시티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숨을 삼켰다. 휘둥그레진 눈동자로 보건대 언성을 높인던 건 우발적인 실수였던 모양이다.


  “큰소리 내서 미안해, 트레이너. 하지만 정말 괜찮으니까······.”

  “아, 아니, 나야말로 미안해······.”


  삐질삐질 사과하자 시티의 표정도 다소 누그러졌다. 소리죽여 심호흡을 하고, 다소 조곤조곤해진 목소리로 덧붙인다.


  “모델 일을 하다 보면 흔한 일이야. 특히 패션 잡지는 특정 상황에 맞는 코디를 소개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메인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연기도 따라줘야 하거든.”


  시티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번에 의뢰가 들어온 곳은 주로 젊은 층을 타겟으로 한 아우터 브랜드인데, 연인, 그 중에서도 ‘달콤하고도 비밀스런 연애’를 테마로 정했다는 모양이다 . 바쁜 일상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만난 두 사람이, 차츰차츰 서로의 간격을 좁혀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이런 클리셰를 시티에 투영시켜, ‘유명 모델의 비밀 연애’를 그려낸다는 컨셉으로.


  “자랑은 아니지만 나, 꽤 어른스러운 이미지로 통하고 있잖아? 저쪽에서도 그냥 내 방식대로 연기해주면 된다고 하더라. 잡지의 주력고객인 10대 소녀들에겐 그편이 더 잘 먹힐 거라나 뭐라나.”

  “시티의 방식이라니, 구체적으로 어떤 연기를?”

  “나도 몰라.”

  “엥?”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 유치원 들어가기도 전에 아역 시작해서 지금까지 쭉 달려왔거든? 불규칙한 생활 탓에 또래랑 어울릴 시간도 없었어. 연애는 무슨, 스캔들 난다고 남자 근처에도 못 가게 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하던대로 해주세요’라니. 참나, 어이가 없어서.”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쿨뷰티한 시티 걸은 어디로 가고, 잔뜩 심통을 늘어놓던 시티가 이쪽을 째릿 노려보았다.


  “······내 트레이너면서 그런 것도 몰라? 것보다 프라이버시 침해거든요?”

  “미, 미안······.”

  “금새 또 사과한다니까. ······이제 알겠지? 트레이너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야. 이런 사소한 걸로 일일이 전화하는게 더 풋내기 같다고.”

  “주의할게.”


  얼핏 모델 업계의 어둠을 훔쳐본 기분이었다. 아직 미성년자인데도 치열하구나······.


  “즉 커플 연기를 해야하는데 경험이 없어서 고민하는 거구나. 내용 중에는 그, ······키스 장면도 있으니까.”

  “맞아. 그러니 대책을 세워야지. 이대로 촬영장에 갔다간 바로 밑천 드러날걸? 저쪽의 요구를 맞추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계약파기도 당할 수 있어.”

  “······혹시나 싶어 묻는 건데, 지금이라도 거절하는 건?”

  “가능할 거라 생각해?”

  “그렇지요······.”


  이제 막 신인 딱지를 뗀 유망주가 그렇게 쉽게 일을 가려받을 순 없겠지. 이런 컨셉만 아니었다면 나부터 등을 밀어줬을 거다. 그렇다 해도 키스라니, 요즘 10대들은 뭘 보고 사는 거람? 아니 그보다 어떻게 해야······.


  그때, 시티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실은 좋은 생각이 있는데.”

  “오오! 얼른 말해 봐.”

  “어차피 잡지에 실을 컷인데 그렇게까지 깊은 접촉을 요구하진 않을 거야. 어디까지나 그림만 나오면 OK인 정도겠지. 실전에서는 제대로 해야겠지만.”

  “그렇지?”

  “요는 경험이 없다는 게 문제니까, 그 부분을 해결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어차피 언젠가는 하게 될 거, 연습한다고 치면 문제 없고······.”

  “······넹?”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야? 여기까지 들었으면 이해했지 싶은데.”


  설마······.

  머릿속에 떠오른 망상을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야속하게도 시티는 가차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러니까 키스 연습을 도와줬으면 해. 이런 거, 트레이너밖에 부탁할 수 없으니까.”


  아니아니아니 이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래요?!


  “농담이래도 그런 말 하지 마. 넌 아직 애야. 앞날이 창창한데 무슨······.”

  “······애?”


  순간, 방 안의 어둠이 한층 짙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진정해, 시티. 방금 한 말은 그런 뜻이······.”

  “그런 뜻이 아니면 뭐? 뭔데?”

  “이래봬도 나는 어른이고, 시티는 아직 미성년······.”

  “어련하시겠어요. 트레이너도 어리면서 뭘, 까놓고 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 그래, 이런 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잖니! 나 같은 게 아니라 나중을 위해 아껴둬야······.”

  “아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소중한 첫키스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해라, 트레이너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는,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솟아오른 열기가 덩어리처럼 엉겨 목구멍을 막아버린 탓에. 까닭모를 두려움이 울분처럼 혓바닥을 짓눌렀던 탓이다. 


  마치 그 이상은 말하지 말라며 다그치듯이.


  “흐응.”


  그런 나를 어느샌가 같은 높이까지 올라온 눈동자가 마주본다.


  “뭐야, 잘난 듯 말해놓고. 트레이너야말로 풋내기면서.”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 잠긴 초승달처럼 휘어진 두 눈은,


  “수락한 걸로 알게. 실랑이는 끝이야. 선생님 노릇을 할 거면 제대로 해. 그때까진 멋대로 맡아둘 테니까.”


  한 번도 닫히는 일 없이, 이윽고 이쪽의 시야를 가득 채워나갔다.


  “번지르르한 입은, 그때까진 내게 빌려줘야겠어.”


  가슴 깊이 흘러들어오는 답답하면서도 달콤한 목넘김.

  나중에 듣기로, 그것이 시티의 첫키스였다는 모양이다.


—⏰—


  그날 이후로 이 비밀스러운 ‘특훈’은 일과가 되었다.


  우리들이 하는 행위가 어떤 위험을 수반하는지는 알고 있다. 들켰을 때의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연습’은 주로 일과가 끝난 저녁 트레이너실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빈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만 갔다.


  때로는 계단에서, 때로는 옥상에서, 교내에 인적 없는 장소는 모조리 돌아다녔고, 그럴 때마다 시티는 더더욱 대담해져 갔다.


  주에 한 번 꼴이던 것이 두 세번으로,

  이목을 피할 거라면 학교 밖이 낫다는 논리에 밀려 스케줄이 없는 휴일은 죄다 호출당했다.


  레이스 용품 구매나 일정 협의 등 써먹을 수 있는 핑계는 많았다. 무탈히 3년을 보낸 팀이다. 학교 측도 의심할 이유가 없겠지. 그런 용무로 외출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둘이서 함께 보낸 시간에 그 비중은 한없이 적었다. 시내 곳곳에 숨겨진 뒷골목에 민망한 추억이 새겨진 건 덤이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밖에서 처리해야할 일들은 주중에 최대한 끝마친 뒤 외출 신청서를 내게 했다. 괜한 짓을 하다 들킬 위험을 늘리느니 트레이너 기숙사로 부르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지만······.


  오히려 불을 붙여버린 모양이다.


  “트레이너, 손이 멈춰 있어.”


  ‘연습’을 할 때의 시티는 딴생각을 금방 눈치챈다.

  여지없이, 또 용서없이, 겹쳐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공기가 새어들었다.


  “어색하게 굳어있지 말고 뭐라도 해. 어깨를 잡는다던지 허리를 받쳐준다던지. 그것만으로도 여자 쪽은 안심이 되니까.”


  알았으니까 쏘아붙이는 건 그만해. 울린단 말이야. 귀가 아니라 입으로 직접, 골전도를 통해서 전해질 정도니까.


  “이렇게?”

  “더 세게.”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안 해. 그런 멋없는 짓.”


  입술을 떼지 않고도 또렷한 발음은 몇 번을 들어도 신기한 재주.


  “끌어 안아도 되니까.”

  “······있잖아, 시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있어.”


  단칼에 긍정한 시티가 내 이마를 쿡 찌르며 쏘아붙였다.


  “어짜피 트레이너니까, ‘키스같은 거 그냥 입술 한 번 박고 끝내면 되는 거 아냐?’ 같은 거나 생각하고 있겠지?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이쪽 업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고? 똑같은 일감을 주고 똑같은 연기를 시켜도 결국에는 자신만의 매력을 어필한 아이만 올라가. 남들과 같아서는 안돼. NG도 3번 이상은 금물. 현장 제작자의 요구를 빠르게 파악해서 촬영 당일 한 번에 끝내는 게 베스트야.”


  듣는 것만으로 질색할 만한 속사정이지만, 나름대로 공감이 갈 만한 부분도 있었다.

  요는 레이스와 같은 단판승부라는 것. 결과가 나온 이후엔 돌이킬 수 없다. 그러니 단 하루의 결착을 위해, 이쪽에서 준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당신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잖아?”
  “어떤 점에서?”

  “그야, 다른 남자에게 부탁하는 것 보단 낫다는 점?”

  “······.”


  그것이 설령, 악마와 함께할 용기가 필요로 하는 일일지라도.


  “어머.”


  각오를 굳힌 반동 탓이었을까, 무심코 힘이 들어간 팔을 흘긋 내려다본 그녀는······.


  “제법이잖아, 트레이너. 좋아,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거 같네.”

  “다음이라니, 그게 무슨······.

  “쉿.”


  이불 속에 파고들듯이 그대로 몸을 맡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당연히 실전이지.”


—⏰—


  “안녕, 트레이너. 빨리 왔네? 언제부터 있었어?”

  “얼마 안 됐어. 1시간쯤?”

  “뭐야? 왜 그랬어? 내가 기다리게 한 것 같잖아.”

  “늦는 것 보단 낫지 싶어서······.”


  본인도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왔으면서 어쩌라는 건가 싶다. 늦으면 늦는대로 무슨 욕을 먹을지 무섭다라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뱉을 수 없지만.


  “뭐, 거리가 머니까 이해는 하는데, 어짜피 기차로 올 거 서두를 필요도 없지 않아?”

  “사전조사도 해 두고 싶어서······.”

  “고맙긴 한데 이쪽이 신경 쓰이면 말짱 꽝이라구요? 그러길래 같이 출발하자니까 고집 부려서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트레센 학원이나 근처 상점 거리를 걷는 건 괜찮다. 많고 많은 중앙, 지방 원정 학생들이 담당 트레이너와 함께 다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장기 계약 팀이라면 다소 거리가 가까운 모습을 보여도 문제될 게 없고, 어떤 방면으로는 권장되는 덕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곤란하다.

  도쿄에서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서도 2시간 반,

  레이스장도 훈련시설도 없는 완벽한 휴양지인 지방도시는, 담당 학생과 단둘이 올 곳이 못 되니까.


  “하아.”


  이 순간조차도 미행이 따라붙지는 않았을까 이리저리 살피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사자인 시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안절부절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다.”


  먹히고 있습니다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사실을 억누른 채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겨드랑이 아래로 시티의 두 손이 휘감겼다.


  “야! 잠깐! 떨어져!”

  “파파라치라면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 좀전에 체크 다 끝내뒀어.”

  “나 보고는 뭣 하러 빨리 왔냐고 잔소리 늘어놓고?”

  “스캔들은 내 문제니까. 트레이너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아니, 걱정할 일인데요?! 이쪽은 사회적으로 아웃인데?!!


  “아, 그렇지 참.”


  빨간줄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어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쪽의 팔을 붙든 시티는 힘찬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오늘 입은 옷, 나쁘지 않네. 앞으로 밖에서 만날 땐 그렇게 입고 오도록 해.”


  그나마 드레스 코드는 합격이라 다행인가.  평소엔 안 입는 가벼운 차림새라 괜시리 오버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평이 괜찮다.

  웬일인지 시티 쪽도 평소보다 산뜻하게 차려입어 앳된 느낌이고.

  아니지, 나이에 맞는 귀여움이라 해야하나?

  이쪽은 최대한 사회인 티를 감추려는 발악이지만.


  그래도,


  “분부대로 하지요.”


  그 순수한 칭찬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또 ‘앞으로’의 주문에 대해, 언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내가 있다.


—⏰—


  지방도시는 조용했다.

  교통편이 좋지 못한 탓에 연휴가 아닐 땐 한산하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확실히 관광지보다는 휴양지에 가까운 인상이다.


  그러고보니 역에서 내리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 환승역이 드문 노선에 탁 트인 역사, 지역주민밖에 없는 거리에서 기자는 아무래도 눈에 띄기 마련이다. 여태까지 보이지 않는단 건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겠지.


  미행이 없다는 게 확인되자 거리낄 게 없어진 시티는 거침없이 일정을 소화해나갔다.


  “트레이너, 나 쇼핑 갈래.”

  “네이네이.”

  “트레이너 옷도 세트로 맞추자. 여행 기념으로.”

  “되도록 안 튀는 걸로 부탁할게.”

  “다음은 카페야. 혼자 먹기엔 좀 많은 2인 한정 파르페가 있거든.”

  “···미안한데, 어느 쪽 기준 2인? 제가 요즘 단 걸 많이 먹어서요.”

  “스티커 사진도 찍을까? 지금 트레이너 얼굴 엄청 웃겨!”

  “너 그런 캐릭터 아니지 않았니?”


  돌이켜보니 쇼핑몰에 디저트 가게에 그 밖에도 많은 곳을 돌아보는 강행군이었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심심하지 않을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어떻게 찾았나 싶을 정도로 꽉찬 하루였으니까. 대부분 시티의 손에 끌려다니는 짐덩어리 신세였지만. 


  아아, 생각해 보니 도쿄에서도 이렇게 놀아본 적은 없었지. 학창 시절에는 공부만 했고. 

  노력이 무색하지 않아 중앙 트레센 교직원 중에서도 가장 젊은 축이 된 지금이지만, 하루아침에 생활패턴이 바뀔 리도 없거니와 하필이면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우마무스메를 첫 담당으로 맞이한 탓에 개인적인 여가를 즐긴 지도 오래 되었다.


  시티의 말마따나 ‘나이 차이’는 그리 안 나지만, 나한테도 연상의 체면이란게 있는······.


  “됐으니까 서두르자. 리프트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어후, 그럼 빨리 가야죠. 

  이제는 익숙해진 팔짱을 고쳐잡으며 나를 이끄는 시티에 맞춰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큰걸?”

  “이 근방에선 가장 높은 산이래. 정상 부근의 전망대에선 도시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댔어.”

  “헤에, 야경도 예쁘겠다. 보고 갈 순 없겠지만.”

  “돌아갈 길이 머니까 말이지.”


  오늘은 어디까지나 당일치기 여행, 해가 지기 전에는 역으로 돌아와야 한다.

  다소 애매한 시간대여서인지 상행선에 오른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행여나 정체를 들킬 위험은 던 셈이지만.


  “흥흥흥~.”


  반대로 말하자면,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을 둘이서만 오롯이 차지한 고로,

  야릇한 긴장감과 함께 느슨해진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서히 붉어져오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르는 시티의 머리가, 어느새 어깨로 내려앉는 것을 모른 척 할 수 있을 만큼.


  “오늘은 고마웠어, 시티. 다음 번엔 내가 준비할게.”


  멋쩍음을 무마할 겸, 기분이 좋아보이는 틈을 타 넌지시 말해보았지만, 당사자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별로. 트레이너는 내가 가자는 데로만 가면 되니까.”


  인간은 우마무스메를 이길 수 없다 라는 거군요.

  누가 말했는지 명언이라니까.


  그런 시덥지 않은 농담을 삼키며, 시덥지 않은 잡담을 나눈 우리는,

  영원토록 두둥실 떠오를 것만 같은 이 시간이 멎을 때까지, 허공에 걸친 두 발을 까딱였다.


—⏰—


  “오, 오.늘.도 정.말. 예.쁘.네? 시티?”

  “떨지 말고 똑바로 말해. 마지막은 왜 물음표야?”


  테이크 1, NG.


  “···정말 즐거운 데이트였어. 너라는 멋진 우마무스메와 함께할 수 있는 난 행운아야.”

  “컷. 난데없이 무슨 뜬금없는 멘트야, 트레이너? 어디 죽으러 가?”


  테이크 3, NG.


  “······실은 오래 전부터 전하고 싶던 말이······.”

  “슬슬 집중력 떨어지지? 다시.”


  테이크 7, NG.


  “······달이 아름답다?”

  “지금 장난해?!”


  ···테이크 11, NG.


  연속으로 퇴짜를 놓던 시티가 기어이 소리를 질렀다. 100년에 한 번 나올 법한 미인은 그런 모습도 그림이 되지만, 나로서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주먹이 지금에라도 이쪽을 향할까 벌벌 떨기만 하는 처지다.


  “당신, 분위기 잡는 법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학생 상대로는 더더욱 생각한 적도 없는걸.”

  “못 살아. 그 나이 먹고 한심해서는.”

  “언제는 차이 별로 안 난다면서?!”

  “애 취급은 그쪽이 먼저 했네요.”


  주먹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찌르지만 말아줘. 오늘 운세에 빨간 네일은 안 어울린다고 적혀 있었다고!

  다행히 아침에 운세를 체크하고 나온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시티는 금방이라도 내지를 것 같은 손을 허리로 되돌렸다. 전망대 난간 너머 먼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묘하게 촉촉하다. 


  단순히 잔소리할 기력도 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호흡은 여전히 거친 상태.

  어줍잖은 형태로 입을 다물어버리니 발치에서 뒹구는 낙엽소리만이 공연히 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는데,

  찬바람 쌩쌩 부는 산 정상에서 어째서 이런 다툼을 하고 있느냐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오늘 여기에 온 이유는 단순한 나들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건 제쳐 두고서라도······.”

  단어 사이사이에 한숨을 잔뜩 머금은, 짙은 못마땅함이 묻어나오는 물음이었다.


  “‘오래 전부터’라는 건 무슨 뜻이야? 그런 건 고백 전에나 하는 말이잖아. 아니면 뭐야? 우리 사이는 아무것도 아닌 거였어?”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당연한 반론조차 허락해 주지 않을 만큼 시티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뭣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한다고 생각해?

  시간이 남아 돌아서 휴일 아침부터 만나?

  세 끼를 같이 먹고, 다음은 어디로 갈지 매번 고민하면서?

  있잖아, 나는 당연히 말을 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었어.

  당신이니까, 트레이너도 싫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충분히 이해하고, 전해졌을 거라고.

  진심이었던 건 나뿐이었던 모양이네.

  ······이런 기분도, 나뿐이었던 모양이네.”


  오늘 이곳에 온 이유.

  본디 트레이너와 담당 우마무스메일 뿐인 관계라면 있을 수 없는 목적.

  확실히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다.

  이른 새벽부터 출발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머나먼 타지에서 세 끼를 같이 먹고, 시덥잖은 오락을 즐기며, 고민해서 세웠음이 분명한 계획대로 움직이며 시간을 보냈다.

  어엿한 어른이라기엔 모자라지만 철없이 묻어갈 수 있을 만큼 어리진 않는,

  그다지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두 남녀가.


  “좀 더 나를 ‘여자친구’처럼 대하란 말이야.”


  그녀의 요구는 명확했다.

  

  “내가, 뭘 위해서, 요 몇달과 오늘 데이트를 해 왔다고 생각해?”


  그 날, 딱 지금과 같이 노을지던 트레이너실, 굳게 잠근 문과 두텁게 친 커튼으로 막은 밀실에서,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했던 사소한 부탁.


  “진지하게 임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단 말이야.”


  이제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대 배우 역할을 말이다.


  “······이해했어?”


  슬며시 다가온 시티가 정면에서 올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거리는 한 걸음 반.

  젖어든 눈망울은 가득 채운 잔과 같아서, 툭 건드리는 것만으로 쏟아질 것 같다.

  이것이 연기라면 프로의 솜씨다. 그녀는 더 이상 아마추어가 아니지만.

  알면서도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로 그 아름다움은 대단했다.


  “시티.”


  무심결에 한 걸음 내딛었지만, 들어올린 손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

  처음부터 내게는 너무도 어려운 부탁이었다.

  이 분위기에서 어떻게, 무슨 말을 꺼내야 좋단 말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남은 거리는 고작해야 반 걸음, 팔을 뻗어 밀어내기에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웠던 고로.


  “······트레이너?”

  “넌 모르겠지만.”


  자연히, 두 손은 두 뺨을 감싸안았다.


  “난 오래 전부터, 진심이었어.”

  “어? ···으읍?!”


  반년간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허리를 당긴다. 나머지 손은 등을 한 바퀴 돌아 반대편 어깨를 받친다. 난간에 부딪칠 그녀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또는 어디로든 가지 못 하도록 막기 위해.

  양손이 묶인 탓에 자유로워졌을 터인 입술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응.”


  최초의 대본에선 다소 떨어진 연기.

  원래라면 달콤한 구애를 속삭여,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곁들여, 달짝지근한 입맞춤으로 끌고가야할 단계이건만, 보다시피 결과는 이 모양이다. 

  어긋나기 시작한 초보 커플, 어쩌면 맺어지지도 못하고 깨져버린 썸.

  그렇기에, 얄궂게도 아슬아슬 커플이라는 구도가 성립될 정도는 되었다.


  “트레··· 이너······.”

  

  인간은 우마무스메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물소리에 섞여 희미해진 목소리는 어쩌면 그 명제가 거짓일 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가냘프다. 떨어진 입술 틈새로 한 줄기 실이 늘어져 황금색 석양에 걸쳐졌다. 이른 새볔녘 거미줄처럼.

  떨고있는 그 몸은 살짝만 바람이 불어도 휙 하고 날아갈 버릴 만큼 가벼워서, 조금 쌀쌀해진 날씨를 핑계삼아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많이 늦었지만, 처음부터 내게 주어졌을 대사를 입에 담으며.


  “조금만 더, 같이 있어도 될까?”


  이제는 손뼘으로도 잴 수 없는 간격 너머로, 뜨거운 한숨이 가슴께에 닿았다.


  “······이 바보야.”


  난들 아니겠습니까요. 

  촬영 구도로 써먹긴 완전히 NG잖아, 이거. 풋풋한 청소년 잡지에서 상대를 울려서 어쩌잔 건데.

  이래서 답지 않은 짓은 하는 게 아니다.


  정말로 바보 짓이니까.


  “어울려 줘서 고마워.”


  아무래도 오늘은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

  

  “다음 장비 배송 서둘러 주세요.”

  “촬영 시작 10분 전!”
  "다음 씬에서 나오는 거지? 있잖아, 요즘 잘 나가는 그 애.”
  “그렇긴 한데요, 아까부터 통 안 보이네요.”

 

  멀찍이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희미한 조명 아래 어두운 대기실, 어스름 속에 떠다니는 먼지 속 굳게 닫힌 문에 눈길이 멎는다. 문틈새로 들려오는 노이즈 낀 인터컴 메세지의 도막 사이로 각종 기자재 소음이 섞여 들어온다. 스튜디오 뒷편 특유의 어수선함이 저 너머에 펼쳐지고 있었다.


  자연히 또렷히 듣고 있을 터이건만,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건 어찌된 영문일까?


  “으응, 읍.”

  

  고개를 살짝 흔들자 멈칫하는 시티.

  뚱해 보이는 얼굴에서 언짢음을 느꼈지만,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평소보다 살짝 긴 침묵 뒤, 뜨거운 숨결이 목구멍으로 밀려들었다.


  “슬슬 나갈 시간이야.”

  “······나도 알아.”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으며, 대기실 거울을 통해 흐트러진 곳이

댓글
  • K200APC 2025/11/02 08:28

    하씨 개 맛있다.

    (tDRxI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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