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비판에 자주 나오는 게
"왜 풍년에 일 시키고 흉년엔 일 안 시킴? 흉년에 일자리를 줘서 쌀과 돈을 풀어야 되는 거 아님? 그래서 망했지~"인데
이게 그럴 수가 없어요 조선의 법 구조상.
일단 이게 결송유취보라는 판례기록임

작년에 겨우 완역이 된 이 책은
숙종 33년(1707년)에 만들어진 판례집임
매번 경국대전 보면서 하기 귀찮으니까
자주 있는 판례들 모아다가 이 사건은 ㅇㅇ 와 ㅁㅁ 보면 이전에 이렇게 했다 이런 걸 모아놓은 책임
근데 여기에 부록으로 기민진제법이란 게 들어있음

문제: 굶주리는 사람이 1,359명인데, 그 중 성인이 573명, 어린이가 416명, 노인이 370명입니다.
어른에게 하루에 쌀 9홉, 어린이에게 하루에 쌀 6홉, 노인에게 하루에 쌀 5홉씩 주면 총 95일 동안 얼마나 많은 쌀이 필요할까요?
이 법에서
성인의 하루 쌀 배급량 :9홉
어린이 하루 쌀 배급량 : 6홉
노인 하루 쌀 배급량 : 5홉
이라는 걸 알 수 있음
사실 이 현대기준 홉으로 하면
하루에 쌀 배급량이 1.6L(...)가 되는데
그렇진 않고
당시 홉은 57.21ml로 보는게 정석임
(일본 기준으로 통일한 잔재)
그렇게 봐도 하루에 쌀 514.89ml야.
보통 180ml 쌀을 1컵으로 센다면 이건 2.86컵
그리고 쌀 1컵으로 밥을 지으면 350~400g의 밥이 나와
이건 햇반 200g을 1공기로 환산하면 대강 5.5공기 정도의 양임.
즉 조선시대의 구휼 기준으로
성인 : 밥 5.5공기
노인 : 밥 3공기
아이 : 밥 3.5공기
정도가 필수지급량이었단 소리지.

이 사진이 점점 신빙성이 올라가는 이유임
그리고 이게 "기본 구휼 지급량"의 기준임.
뭔소리냐?
조선의 세율 상 원칙 1-2할, 사실상 2-3할, 잡세 횡령 포함 최대 4할을 걷어가는 기준 상
이 흉년 기본 구휼에 쓸 만큼의 쌀을 비축하는 것 조차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음
특히 조선 말기로 가면서 세도정치 말기에 부패가 심할 때는
아예 흉년에 풀 쌀이 한달치도 안 될 정도였기도 하고.
그럼 조선이 이걸 안 하고 어떻게 하면
조선판 빅딜, 그러니까 흉년에 일시키고 그걸로 쌀 지급을 할 수 있냐?
기본 세율을 4할로 올리고 잡세 포함 7할-8할까지 올리는 칠공삼민 해야지
하지만 조선은 썩어갈 때까지도 유교 기본을 기본으로 단 국가임
그래서 못했음
풍년엔 왜 역을 했냐고?
풍년이라서 따로 먹을 거 찾으러 산과 들과 바다를 뒤지지 않아도 될 떄니까
일손이 남으니까 그때 삼베나 무명 이런 걸 걸고 사람 모여야 좀 모이거든
조선이 화폐경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작은 경제사회였던 것도 큼.
이건 애초에 고려의 사치경제를 철저하게 경계하면서 양반 문화를 "퍼주는 문화"로 정착시킨 것 때문에
(양반 반가는 조선 마지막 50-60년 뺴면 얼마나 손님대접 잘하냐만으로 부잣집 평가를 햇었음)
사치할 계급이 사치할 만한 돈이 없음
- 사치를 안 하니 고부가가치 산업이 성장을 안함
- 1,2차 기본산업 위주로 가니까 상업이 물량 위주로밖에 안됨
- 이걸 전부 커버할 상인들이 거의 없어서 사실상 조운산업이 상업 그 자체가 됨
등등의 이유도 있음
그러다보니 돈으로 주면 흉년에 쌀을 사죠 이거조차 안되니까 전부 다 쌀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거
결론
1. 우리 조상은 쌀 많이 먹었다
2. 백성 많이 먹이는 게 유학의 기본 덕목이다
3. 그래서 일단 백성 먹이고 남는 걸로 뭐 하려고 하니까 돈이 없었다
뭐 좀 될라치니깐 임란+호란+경신대기근 콤보 쳐맞고 이걸 <회복> 한게 숙종/영조 때였으니까...
뭐 좀 될라치니깐 임란+호란+경신대기근 콤보 쳐맞고 이걸 <회복> 한게 숙종/영조 때였으니까...
안그러면 산업혁명으로 파이를 키우거나
백성을 쥐어짜던가
산업혁명의 시작은 치폴라의 주장에 따르면 "시계산업과 대포산업의 발전", 다른 학파는 "항해의 발전"이 시작임
사치산업, 군산복합, 혹은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산업들임ㅋㅋㅋㅋ
조선은 태종 세종이 다 엎어가지고 그런 걸 다 틀어막아서 제민경제로 시작한 나라라
인적인 요인 아니더라도 요즘와서도 뭐 화학비료 없이 뭘 심어서 기를라 치면 잘 안올라감...
유교적 덕목을 우선시한덕분에
강력한 중앙집권이지만 재정적으로 작은정부라는 진짜 전근대에선 보기드문 형태란말이지
태종이 고려 호족을 박살내고 세종이 "나보다 잘할 수 있음?"을 시전해서 성공한 방식임
베트남도 비슷하긴 한데 거기는 왕권이 약하고 귀족들이 권한을 나눠가진 형태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