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 출저)https://www.pixiv.net/artworks/95818864
사람은 충격을 크게 바뀌면 성격에 다소 변화가 일어난다.
“아야베.”
“….”
“저기 아야베 씨?”
“…왜.”
“지금 통금 시간이 다가오는데 왜 자러 안 가?”
“내가 가면 또 새벽까지 일할 사람이 트레이너, 당신인데 그러면 안심할 수 없어.”
“아니, 어째서.”
그리고 그건 우마무스메도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읽고 있던 천문학 잡지를 덮으며 재깍재깍 답해주는 어드마이어 베가는 이전과는 어딘가 약간 달라진 것만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특히 그 자수정 색 눈으로 왜인지 모르게 억울해하는 트레이너를 힐끗 쳐다보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퇴원한 지 한 달 만에 그날의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거든.”
“그래도 이제 나름대로 관리 잘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병원에서 절대 안정이라 말한 걸 귓등으로 흘리고 병실에서도 일을 하셨다?”
“….”
나름의 항변을 하려던 트레이너의 말을 단칼에 반박해서 격침한 그녀는 기다란 귀를 희미하게 까딱거리며 지그시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쐐기를 단단히 박았다.
“당신이 쉬러 가는 거 볼 때까진 안 가. 후지 씨한테도 미리 LANE 넣어뒀어.”
“…어째 준비성이 철저하다?”
“지켜보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조절한다니까.”
숨이 턱 막히게 하는 말에 트레이너가 다시금 반박을 시도했지만, 그 사이에 아야베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퇴근 시간이 됐네, 일 끝내고 어서 쉬어.”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어째 스케줄 관리를 당하는 것 같은데….”
그녀와 함께 지난 3년 간 함께 달려온 트레이너가 확연히 느껴질 정도의 변화는, 분명 눈앞에서 쇼크로 쓰러졌던 일이 크게 작용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히 건강 관리에 들어갈 줄은 그 누가 예상했을까.
-⏲-
기억을 되돌려보면 이런 관리는 그가 퇴원한 날부터 바로 실행되었다.
우선 습관처럼 들이키던 에너지 음료와 커피, 거기에 카페인 캡슐까지 모조리 압수당했다.
단어 선정이 뭔가 이상한데, 싶을지 몰라도 정말로 그가 퇴원하고 돌아온 트레이너실에는 여기저기에 쌓아뒀던 트레이너의 귀중한 카페인 공급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엄청난 사태에 말문이 막힌 것도 잠시, 설마 하는 마음에 방을 뒤져보자 역시 안 보이게 숨겨둔 니코틴 공급원마저 샅샅이 뒤져져서 다 처분당해 있었다.
과로에 시달리는 사회인에게 필수적인 각성의 탕약과 용기의 연초들이 정말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서 어마어마한 탈력감을 느끼는 가운데, 아야베가 했던 선언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었다.
“윈터 드림 트로피까지 한참 남았고, 그전에 당신 건강을 반드시 정상궤도로 올려놓을 거야. 식사도 위에 부담이 안 가는 걸로 내가 매일 싸 올 거니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니 그건 좀 심한데?”
“누가 그래서 건강 악화시키고 방치하라고 협박이라도 했어?”
“…아뇨.”
“인스턴트나 레토르트 사 먹을 생각도 하지 마. 오늘 저녁도 내가 싸 왔으니까.”
그 말과 함께 턱, 하고 앞에 놓인 3단 도시락 탑은 담당 우마무스메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증명하고 말았다. 아야베가 꼼꼼한 건 알고 있었지만, 실로 예상을 뛰어넘은 행보에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하나씩 도시락을 열어보자 더더욱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녹색과 붉은색이 파릇파릇한 샐러드‘들’이 우선 하나.
그래, 하나다. 한 단이 전부 3종류의 샐러드로 가득 차 있다는 소리다.
두 번째 단은 딱 봐도 색이 연한 것이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양념을 최소화해서 조리한 연어에 뭉쳐서 한번 구운 후 조린 듯한 고기 경단, 아니 솔직히 경단이 고기인지 확신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두부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걸로도 부족한지 색은 선명한 노란색이지만 분명히 달거나 짜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계란말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섬유질에 비타민에 단백질을 꽉꽉 위장에 채워주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선정이었다.
탄수화물? 위에 부담을 줄이려고 작정한 것인지 평상시 먹던 양의 절반도 안 되었다.
그나마 그것도 보리를 비롯한 잡곡이 여럿 든 잡곡밥이었지만.
“…아야베.”
보기에는 그래도 총천연색이라 화려했다. 하지만 근 3주 가까이 병원에서 환자식만을 접해오던 트레이너의 미각은 사회의 자극적인 음식을 갈망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접할 길이 없었던 그 자극에 대한 갈망이 생각만 해도 든든한 지로라멘에 교자를 해치우고 싶다는 충동으로 가파르게 치솟는 욕망을 단 한 마디로 함축해서 말한 트레이너였지만.
“식당 가고 싶다고 말하지 마. 또 위에 구멍 날 일 있어? 당신 아직 환자야.”
“….”
바로 파악한 아야베에 의해 깔끔하게 차단당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회복에 방해가 될 것들을 전부 한동안 손도 대지 못하게 컨디션 회복시키려면 방법이 없었어.”
그녀가 덧붙인 말에 순간 일말의 희망이 보인 것 같았다. 트레이너는 강제 금연, 카페인 금지 생활 속에서 그걸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정도로 과로에 찌들어 있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그럼 알코올은-.”
“….”
“안 되겠구나.”
답변 대신 눈가를 가늘게 하고 지긋이 쳐다보는 어드마이어 베가의 모습에 결국 그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당신을 보면 왜 이렇게 자신에게 무심한지 이해가 안 가.”
침묵의 끝에 날아든 날카로운 말이 가슴에 푹, 하고 꽂힌 건 두말할 나위 없으리라.
결국 귀중한 니코틴 공급원과 카페인의 원천들이 싹 사라졌다는 현실에 슬픔을 느끼며 트레이너는 그날부터 담당 우마무스메가 정말로 식사 시간마다 들고 오는 도시락을 들어야 했다.
-⏲-
그게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병원에서도 예상보다 회복이 빠르다는 진단을 받았고, 덕분에 처방받은 약도 이번에 다 먹으면 더는 먹을 필요가 없다는 말도 들었다.
병실 생활 3주, 그리고 회복기 1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 사이에 엄청난 금단증세들이 아주 환장할 기세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담당이 서늘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도 있고, 애초에 위에 구멍이 거하게 뚫린 게 업무의 피로를 덜기 위해 의존하던 기호품들이 원인의 큰 축이라는 것도 있어서 껌에. 사탕에 금단증상을 버틸 수 있게 도와주는 모든 것들을 와작와작 씹으며 버텼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에서 여태 써온 인내심들을 우습게 여겨질 정도의 정신력으로 버틴 끝에, 한 달에 이른 지금, 드디어 혈관에 흐르는 카페인 탕약과 뇌를 찌들게 한 니코틴의 여파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렇기에 이제는 꽤 상쾌하고 맑아진 정신으로 담당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
그가 일을 정리하기를 기다리다가 피곤을 느꼈는지 트레이너실 안에 있는 작달막한 소파에 앉은 채로 예나 지금이나 선호하는 폭신폭신한 쿠션을 껴안은 채 선잠이 든 아야베는 언뜻 보기에는 이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좀처럼 보여주지 않은, 깍지를 낀 손에는 변화가 있었다.
언뜻 봐도 꽤 많은 반창고가 붙어있는 손가락들.
그리고 한 달 내내 삼시세끼 도시락을 싸면서 생긴 자잘한 상처들이 겹쳐서 떠오르기 시작한 약간의 굳은살. 이는 단순히 그녀가 그의 컨디션을 관리해 준다,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소 늦게 깨닫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랬구나.
역설적으로 모든 중독적인 기호품들과 단절되어, 과거보다 더욱 맑아진 머리는 이제야 아야베가 어떤 감정으로 지난 한 달 동안 꼬박꼬박 시간에 맞춰왔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건 여전히 타인을 대하는 것에 대해 그리 녹록지 못한 그녀가 처음으로 단 한 사람을 생각해서 내린 커다란 결단이었다. 분명 이전에도 요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긴 했다. 여름 합숙에 샌드위치를 만드는 모습이라거나, 가끔 기분 전환을 하고자 같이 천체를 보러 갈 때 만든 간단한 요깃거리라거나.
하지만 그건 지난 한 달과는 다소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 아야베가 해온 음식들과 최근에 계속 싸 온 음식들은 꽤 큰 간격이 있었다. 이렇게 다채롭게 체력과 회복에 좋은 음식을 다양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으니 분명 누군가에게서 그가 입원해 있던 기간 동안 최대한 배워왔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혼자서 몇 가지 간소한 음식을 가끔 요리했다 한들, 최근처럼 하루에 3번씩 끼니를 해결할 음식을 만드는 데에 있어선 엄청난 피로가 따라올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잊고 있겠지만 트레센 학원의 우마무스메들 절대다수는 학생이다, 아침부터 수업에 들어가는 학생들.
즉, 오전 첫 수업이 9시 반이니 그의 담당 우마무스메는 매일 같이 꼬박꼬박 새벽에 일어나서 그를 위한 삼시세끼를 한 달 내내 준비했다는 뜻이다.
손에 난 자잘한 상처들은 그 생활이 반복되어 점차 피로가 누적되면서도 오직 그를 회복시키고 싶다는 굳은 마음 하나로 주방이 있는 곳에서 요리해 왔음을 알리는 증표나 다름없었다.
“…뭘 보고 있어?”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어느새 눈을 뜬 아야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못 본 사이에 손에 상처가 많이 생겼구나 싶어서.”
그런 그녀에게 트레이너는 평소와 달리 다소 에둘러 넘어가려고 시도했다. 그야 그럴 게 손이 어찌 되었는지 그의 담당은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고, 오히려 숨기려 들었으니까.
“봤어…?”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은 다소 예상을 벗어났다.
“미안, 히시 아마존 씨랑 슈퍼 크릭 씨한테서 최대한 배웠는데도 한 달 동안 당신을 그리 만족시키지 못했어.”
아야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히려 그에 대한 사과였으니까.
“최대한 위에 부담이 덜 가면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재료들에 조리 방법으로 만들었는데, 역시 처음 하는 유형의 음식들은 고작 한 달 가지고는….”
말끝을 흐리며 의기소침해진 듯, 귀도 다소 처지자 그제야 트레이너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가 단순히 우려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야베, 너….”
속내가 희미하게나마 들춰진 탓일까, 아니면 다시금 자책감이 고개를 드는 탓일까. 그의 담당 우마무스메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단순히 추측의 영역에 있던 본심을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서 사실, 1주일 전에 일상적인 루틴으로 돌아가도 문제없다는 것도 알아챘어.”
“….”
“하지만 끝내는 순간, 당신이 다시금 그때처럼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어. 나는 그걸 도저히 다시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어.”
어드마이어 베가의 자수정 색 시선 끝에는 꽤 오래된 바닥의 얼룩이 있었다. 때를 탄 상아색 바닥에 진 얼룩은 언뜻 보면 밤하늘의 색을 반전시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순전히 내 독선이자 고집이었어. 당신‘마저’ 잃기 싫다는 고집.”
그리고 그 시선을 천천히 올리며 말함과 동시에, 트레이너는 안 그래도 정리하기 힘든 머리가 다시 잠깐 멈췄다. 눈에 들어온 것은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정리하기 어려워하는 낯선 눈빛을 지닌 아야베였으니까.
“미안해, 트레이너. 내 고집에 강제로 끌어들여서.”
마지막으로 건넨 말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가운데, 트레이너는 잠시 눈을 감았다.
-⏲-
꽤 젊은 나이에 URA 트레이너 전형에 발을 디뎠고, 그 이후 여러 우마무스메들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꽤 암울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일부는 트윙클 시리즈의 문턱에서, 나머지는 겨우 첫발을 내디딘 단계에서 한계를 느끼고 질주를 중단한 아이들이 전부였으니까. 그때마다 그는 자책했다. 그가 모자라기에 이런 결과 밖에 내지 못하여,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접게 했다고.
그랬기에 그는 처음 어드마이어 베가의 질주를 목격했을 때 무언가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냉정함 뒤에 드리운 어두운 자책감에 자기 파멸적인 행보를 보이는 우마무스메라니, 이거 솔직히 귀한 사례였다.
그야 그럴 것이 나름 명성이 높거나 유망주로 물망에 오른 우마무스메들은 여러 의미로 유명한 기행의 집합체 골드쉽 같은 기행의 가면을 쓰고서 막중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잦았으니까. 심지어 그 영애 분위기 진한 메지로 맥퀸은 또 어떻던가, 본색이 드러나니 트레센 학원 전체에서 손꼽히는 빠따 매니아 아니던가.
물론 겉보기에는 매우 멀쩡하고 진중한 유형의 심볼리 루돌프를 위시한 트레센 학생회나 폭군을 자처하는 오르페브르 같은 아이들도 있었다만, 이것도 ‘어른’인 트레이너들의 시점으로 보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철저한 자기방어적 연극이었다.
그 연극에 통달하다 못해 아예 물아일체가 되어버린 것 같은 우마무스메로 바로 떠오르는 게 티엠 오페라 오기도 하고.
드물게 하루 우라라처럼 밝고 순진하다 못해 우마무스메로서의 본능인 달리기와 호승심에도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례가 있긴 했다만, 이건 우라라가 이상한 거다.
그렇게 정신적 압박이라는 크나큰 요소를 어떻게든 가리면서 역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기행으로 펑펑 터트리는 유형이 주류인 트레센에서, 가면을 쓰지 않다시피 하며 부정적인 감정으로 혹사를 자처하는 부류는 진짜 매우 손에 꼽혔다.
뭐, 여기에도 사일런스 스즈카 같은 예외가 있긴 하다만 이 도주광은 가을 천황상에서 다리에 무리가 오는 걸 감지하고도 대도주로 질주하며 폭발해 버린 도파민에 뇌가 마비되어 ‘영광스러운 일요일’로 여전히 입에 오르곤 하는 역대급 레코드를 찍은 후 현역에서 물러난 거라 얘도 좀 이상하다.
아무튼 저런 감정을 절제하는 것 같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자신에게 향하는 유형의 우마무스메를, 그것도 차기 유망주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애가 저러한 걸 봐버린 트레이너는 동류를 봤다고 공감할 시간이 없었다.
자괴로 치닫는 질주를 멈추고,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는 길을 가도록 하는 것.
치프 트레이너에게서 독립하여, 홀로 서는 트레이너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리숙함으로 인해 트레센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담당들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그는 우마무스메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바라는 바를 이루길 바랐다.
그렇기에 그는 담당 우마무스메인 어드마이어 베가보다 먼저 그녀의 동기 세대들에게서 ‘가장 상냥한 트레이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멋대로 서 있는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그저 곁에서 쓰러지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며, 왼쪽 다리의 문제 같은 사소한 것도 잡아내어 그녀가 일평생 단 한 번만 도전할 수 있는 트윙클 시리즈에서 달릴 수 있도록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인해, 그녀가 국화상을 계기로 자책감에서 해방되어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달리기 시작한 이후 감정을 읽어보려는 시도를 끝냈다.
다시 말하지만 트레센 학원 대부분의 우마무스메들은 학생이다.
그것도 감정선이 아주 요동치는 피 끓는 사춘기 소녀들.
좀 잘 뛰고 힘세다 하여 이 애들이 한창때 아이들이 아니라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그래서 ‘대체 왜 레이스에서 순위권에 안 드는 애들을 사춘기라는 걸 고려 안 하고 위닝 라이브 백댄서로 세워 정신적인 상처를 입히나?’ 같은 의문이 있긴 하지만,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경주에서의 호승심을 지닌 것이 이 우마무스메라는 생물이라는 거 생각해 보면 또 문제없을 거 같기도 하고….
잠시 이야기가 샜다, 다시 돌아가서.
결국 이러나저러나 학원에 통학하는 우마무스메들은 학생이다. 그것도 섬세한 사춘기 여학생들.
뭐 호쾌함을 넘어 도저히 여자애로 안 보이는 짐승내를 풀풀 풍기는 애들도 있긴 한데 이건 특이사례들이다.
결국 감정에 너무 깊게 공감하거나, 읽어내는 순간 아직 덜 여문 정신이 어떤 방향성을 향해 질주할지 모르는 감수성 풍부한 아이들. 이 유형이 절대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트레이너라는 직업은 교육자이자 길잡이로서 거리감을 유지하며 언젠가 성인이 될 애들이 잠깐의 감정을 털어내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향하게 하는 것이 대다수, 지만….
-이게 맞나?
문제는 그렇게 나름 선을 잘 그어왔다고 생각한 그의 담당 우마무스메, 어드마이어 베가는 아무래도 그가 쓰러진 날을 계기로 받은 충격을 통해 시선이 어딘가 달라진 것이 확실해졌다는 것이었다.
담당에게 보쌈당하는 트레이너?
담당을 친가로 소개하는 트레이너?
저런 도시 전설은 트레센의 학생들과 트레이너들에게 종종 들려오긴 한다. 하지만 직접 보고 들은 유일하다시피 한 사례는 미스터 시비랑 그 트레이너다. 아주 마이웨이로 살아가는 애라 그런지 트윙클 시리즈 내내 유사 상견례를 해오다가 결국 졸업 후 그 트레이너랑 결혼했다던가.
저런 진짜 희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진짜 손에 꼽는 게 저런 도시 전설의 현실이었다.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미성년자랑 아무리 젊은 축에 들어도 털 덥수룩한 아저씨가 눈이 맞는다? 이거 사회적 자살행위다. 현대 문명의 도덕성이라는 건 우마무스메와 그 트레이너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어째 그의 담당이 그런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
“아야베, 넌 무엇을 위해 살아가려 하니.”
직감이 틀렸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몇 분 전처럼 말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냐니, 그런 건 아직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너무 범위가 넓은 질문이긴 하네, 그러면 정정할게. 아야베, 너는 트레센을 졸업한 이후 어떤 길을 걸으려 하니.”
기다란 귀를 지닌 일등성이 약간 혼란해하자 트레이너는 침착하게 질문의 범위를 좁혔다.
그리고 그 말은 예상 밖으로 큰 효과를 나타냈다.
“졸업 이후, 라…. 그러고 보니 윈터 드림 트로피가 끝나면 졸업이었지.”
“그렇지,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니? 하고 싶은 것이 있을 텐데.”
어드마이어 베가는 그 말에 턱을 짚으며 고민하다가 순간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그를 향해 돌렸다. 마치 무언가를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졸업하면 당신하고 만나는 것이 힘들어지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정답이 한방에 뽑히다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삼여신이시여.
물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야베 본인은 제대로 인지를 못 한 낌새가 보이는 것이 약간의 위안이었지만, 결국 이건 그의 자기 관리 불찰이 불러온 결과였다.
“…뭐 사회에서 섞여 살아가다 보면 만날 일은 생길 테니 그런 건 미리 걱정하지 마.”
“하지만 트레이너는, 당신은 내 곁에서 걸어주겠다고 했잖아.”
항변하듯 말하는 아야베를 향해 고개를 내저은 트레이너는 나름대로 선을 그었다.
“트윙클 시리즈와 윈터 드림 트로피까진 가능하지, 하지만 그 이후는 우리 둘이 가는 길이 달라질 거다.”
“가는 길이 달라진다, 라….”
그 말을 찬찬히 엄지손톱과 함께 곱씹던 그녀는 순식간에 어떤 결론에 도달한 듯,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러면 가는 길이 같아지면 문제없는 거 같은데?”
-어?
잠시만 이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는데.
그 순간, 트레이너의 머릿속에서 과거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부디 그 애를 잘 지켜봐 주세요.】
하필이면 트윙클 시리즈에 발을 딛기 전, 아야베의 어머님에게서 들은 말이라 문제지.
뒤늦게 처음부터 코가 꿰일 안배가 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은 트레이너였지만, 이미 늦었다.
-⏲-
가는 길이 달라진다.
그러면 같은 길을 걸으면 된다.
그 단순하지만, 급발진이나 다름없는 결론에 도달한 순간 어드마이어 베가는 마음속 깊이 싹터서 넝쿨처럼 뒤덮어가던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 그랬구나.
여동생이 있었지만, 이제는 빈 곳만 남은 자리를 덮고 있는 넝쿨을 보며 그녀는 결국 자각하고 말았다.
“나, 트레이너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트레센 학원에 미스터 시비에 이어 두 번째로 공식적으로 현역 때부터 함께하며 결국 어딘가로 골인할 두 번째 사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하늘 저 멀리에서 자취를 감춘 푸른 별에 있는 누군가가 보면서 ‘언니, 예비 형부 파이팅!’하고 응원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아야베는, 어드마미어 베가는 마침내 연심을 자각했다.
아야베 어머니가 한 말은 실제 육성 스토리 극초반에 나오는 대사
또레나 너 미리 작업 당한 거야
설하류
2024/08/01 15:58
트레센은 맞선이나 중매장소가 아닙니다!(맞음)
카니에타
2024/08/01 19:54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하늘에 있는 동생도 분명 잘 됐네, 언니! 형부랑 있는 거 즐겁잖아?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