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7일 이었나?
2교시가 끝났는데 집에 가라고 했어요.
바로 옆에 있는 전남기계공고 오빠들이 어디론가
막 뛰어가고 학교앞엔 군인들이 있었는데 새까만
몽둥이로 우리를 툭툭 치며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학교는 안갔고 집 근처 조선대에는
군인들이 주둔했고 도청앞에선 매일 데모를 했는데
학교도 안가고 심심했던 저는 도청앞에 놀러 다녔습니다.
그때 어른들은 어떤 멜로디에 맞춰 전두환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석방하라 그러더군요.
전두환 이름을 처음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고 갑자기 조선대에 주둔했던
군인들이 안보이면서 유리창이 다 깨진 버스에는
시민들이 타서 각목으로 차벽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고
어느날부터 어깨에 나무총을 메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김밥도 싸고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는 버스마다
아이스크림, 과자를 막 넣어주셨어요.
고등학생 오빠는 그 버스를 타고 다니다 군인들의 공격에
놀라 화순 근처 어딘가에 내려 유난히 더웠던 그해 5월
집까지 걸어왔다고 했습니다.
생각보다 시내는 평화로웠지만 무서운 이야기가 많았어요.
밤 방송국이 불타오를때 불길은 집에서도 보일 정도였고
헬기가 도청쪽으로 날아간 후 뭔가 엄청난 소리도 났었죠.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 했습니다.
그리고 27일 새벽 집 앞에 천둥치는 소리가 나서 몰래 내다보니
티브이에서나 보던 탱크가 지나가고 그 뒤로 끝도없는
군인들의 행렬이 지나가는데 새벽4시 어스름에 흐릿한
형체와 엄청난 수가 내는 군홧발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디ㅡ.
엄마는 어쩐다냐. 도청에 학생들 다 죽일랑갑다 하시면서
문에 솜이불을 못으로 쳤습니다.
군대가 지나가고 한시간이 지났을까요?
애절한 도움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굉주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요. 계엄군이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라며
어떤 여자의 목소리는 울부짖고 있었고 도청 쪽에서는
끝없이 총소리가 나는 공포의 새벽이었습니다.
총소리가 잦아지며 아침이 왔고 골목마다 계엄군이 들어왔습니다.
골목 첫 집이었던 우리집에 물을 달라며 군인이 들어왔고
그가 메고 있던 총 끝엔 까맣고 날카로운 칼이 달려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모두 죽을거라고 했죠.
총보다 그 칼의 무시무시함은 지금도 선명하게 각인 되었습니다.
학교를 갔더니 같은반 친구의 책상에 국화꽃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갔더니 반사선생님이 안보이셨습니다.
도청앞 상무관에서 본 그 수많은 태극기가 시신을 덮고 있었다는.걸
나중에야 깨달았고 나는 지금도 5월이 되면 칼과 군화소리가
기억나 슬프고 무섭습니다.
오늘 대통령께서 유가족을 안아주실때 엉엉 울었습니다.
80년 5월 6학년이었던 나를 안아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대통령을 뽑아주신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5월 유가족, 그 당시 광주에 거주했던 분들 모두 오늘
치유의 눈물을 흘렸을거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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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광주에 빚진 거라 생각합니다. 숭고한 용기와 희생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원 글에 보시면 82쿡 회원님들이 겪은 5.18이 댓글로 나와있는데
이 또한 보면서 눈물 흘릴 정도네요..
댓글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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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금 광주 삽니다.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 .
대학생 시절 운동권이였던 언니가 세월호 이후 모임을 주도하고 계신데 국정원에서 남편에게 그렇게 전화를 해 댔대요.. 부인 단속잘 하는 내용으로.
당사자가 아닌 가족을 괴롭히는... 국정원xx
선거전 이야기라 하니. 선거 끝나고까지 저 짓을 하고 있지는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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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열흘 전까지
80년 그때와 다름없는 세상이었다니 ㅠ
하 ..... 진짜 ..... 현실감이 없을정도에요 ㅠ
ㅜㅜ
ㅠㅠ
당시 광주 전화가 불통이었죠.
광주 외갓집에 계속 전화를 돌리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던 엄마얼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나중에 어른들끼리 소근거리는 말씀을 옆에서 들었는데
당시 제대하고 복학준비 중이던 외삼촌이 잡혀갔고
외할머니는 외삼촌 찾기 위해 온 시내를 뒤지며 많은 일들을 보셨다고 합니다.
1주일만에 돌아온 외삼촌은 군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갔고
다치거나 죽지않고 돌아온 사람은 수용됐던 천막안에서 본인이 유일하다고 했답니다.
거기 책임자가 외삼촌 군에서 알던 사람이었다고...
외삼촌은 그 후 공무원이 되셨는데, 항상 입이 무겁고 눈빛이 형형합니다.
그 눈빛에 담겨있는 많은 얘기가 가끔 몹시 궁금하곤 했는데,
이젠 그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저도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ㅜㅜ 살면서 그렇게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그날 시청에 내가 있었다면~~ 눈앞에 죽음이 닥쳐 있는 상황이라면~~
어른들이 광주사태 그땐 그렇게 불렀죠...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그렇게 쭉 빨갱이 폭동으로 알다가 중학교 국사 시간에 국사선생님이 광주의 5월에 대해 말씀해주셨을때 저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듯 엄청놀랐었죠 내가 알았던게 거짓이였구나 그후로도 항상 내가 빨갱이 폭동이라고 믿었던 그 시간들이 항상 미안하고 미안했었습니다.
무섭고 눈물나고 ㅜㅜㅜㅜ
PTSD..1980년 5월 광주는 독재와 전쟁중이었고 잔인하게 짓밟혔다.겉에서 보면 멀쩡한 듯 했지만 속으로 곪아가고 있던 상처는 문통의 눈물과 포옹으로 10년만에 치료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상상조차 안되는데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ㅠㅠ
당시, 도청으로부터 반경 500m 이내에 살았더랬습니다.
본문의 글.........딱 저 느낌이었습니다.